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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16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7-15 11:04:32
  • 수정 2015-08-20 13: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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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당신의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당신이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시오.”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루가복음 5,12-16)



12절에서 어느 한 고을에라는 우리말 번역은 어느 도시 중 한 도시에라고 고치는 것이 더 좋겠다. 예수의 활동 영역이 크게 넓어졌다는 뜻이 담겨 있다. 원본으로 삼은 마르코 1,41에 나온 예수의 분노를 루가복음 저자는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 단어는 삭제되었다.


12절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lepra는 한센병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Lepra는 레위기 13, 14장에서 언급된 피부병을 가리키는 단어다. 나병이란 단어에서 히브리 문헌들은 다양한 심한 피부병을 가리켰다.


레위기 13장은 두 종류의 나병을 언급하고 있다. 어느 병에 걸렸는지 최종 판정은 의사가 아니라 사제가 했다.(레위기 13,45-46) 사제는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레위기 규정에 의해 환자가 어느 병에 걸렸는지 판정하였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종교적으로 불결한 상태로 여겨져 사람들과 차단되었다.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라고 소리쳐야 한다.(레위기 13,45; 민수기 5,2) 그리고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한다. 나병환자는 죽은 자와 별 차이 없었다.(열왕기하 5,7; 욥기 18,13) 최근 메르스 탓으로 격리되어 지낸 사람들은 나병환자의 심정을 잘 알 것이다.


예수에게 다가온 나병환자는 이미 율법 규정을 어겼다. 다가오면 안 되고 오히려 예수에게서 멀어져 가야 했다. 환자에게서 뒷걸음치지 않은 예수도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는 것은 간청하는 자세로 공동성서에 흔히 보인다.(창세기 17,3; 레위기 9,24; 민수기 16,4)

치유 받기 위해, 살아있는 인간의 기쁨과 자유를 얻기 위해 이 나병환자는 기꺼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님kyrie단어가 반드시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열왕기상 1,23, 다윗; 열왕기상 18,7, 엘리아; 에제키엘 11,13, 하느님)


자유를 얻기 위해 무릎을 꿇은 가엾은 환자에게 예수는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미는 행위는 문화마다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는 도움의 손길로 손을 내밀었다. 13절 깨끗하게 되시오는 원래 법적 판결문에서 쓰이던 단어였다. 공식적으로 병이 나았다는 예수의 선언이겠다.


13절에서 손을 내미는 자세가 반드시 하느님을 연상케 하는 태도는 아니다. 손으로 환자를 만지고 말로써 치유가 행해졌다.(루가 7,14) 그러나 말없이 손으로 만지는 것으로도 치유기적은 일어났다.(루가 6,19; 8,44-47; 22,51) 14절에서 예수의 침묵 명령을 루가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치유 받은 환자에 대한 예수의 침묵명령을 성서학자들은 다양하게 해석하였다. Bovon에 따르면 이런 의견들이 있었다 : 기적을 숨기려는 의도, 사제의 판정을 기다리는 입장, 예수가 메시아라는 시실을 숨기려 함, 유다인을 의식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을 숨기려 함, 치유자의 신비감을 더하려는 의도 등.


오직 사제에 의해서 나병이 치유되었는지 판정되고 선언되었다.(레위기 13, 14) 물론 사제가 의사는 아니었다. 치유된 환자는 예루살렘성전에 가서 정해진 제물을 바쳐야 했다.(레위 14,1-20) 가난한 환자에게는 예물 규정이 따로 있었다.(레위기 14,21-31)


사람들은 왜 예수에게 다가왔을까.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싶었다. 아니, 자기들의 아픔을 예수에게 말하고 싶었다. 예수가 일방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말은 먼저 듣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선뜻 마이크를 잡을 일이 아니다. 먼저 사람들의 말을, 한 맺힌 사연을 가슴으로 귀담아 들을 일이다. 종교인들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는가.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알고 있는가.


사람들은 왜 예수에게 다가왔을까. 병을 치유 받고 싶어서다. 병 고침은 환자가 사회적으로 복권되는 의미도 있었다. 다시 사람들 속에서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료에 드는 돈이 더구나 없었다. 죽음은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찍 찾아온다.


죽음에 대한 묵상은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한다. 의료보험에 가입되지 않아서 깊은 산사에서 홀로 병마와 싸우는 노스님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떠오른다. 평생 돈 걱정 없이 사는 가톨릭 사제들과 수녀들이 그 심정을 짐작할까.


초대교회 사람들은 왜 오늘 나병환자 치유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려 했을까. 그보다 먼저, 왜 이 이야기를 좋아했을까.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를 기적을 일으키는 분으로 홍보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초대교회는 나병환자 치유 사건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이 주장은 독일 가톨릭 성서학자 쉬르만Schuermann이 처음 제안하였다.


예수의 치유기적 이야기에서 예수의 병 고치는 능력은 자주 강조되었다. 그러나 환자에 대한 예수의 연민과 자비는 그에 비해 덜 주목받아 왔다. 이 점을 우리는 다시 회복해야 한다.


예수는 능력자 이전에 자비로운 분이다. 자비 없이 능력 없다. 자비 없는 능력은 의미 없다. 예수의 치유이적에서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구세주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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