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짊어진 십자가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기도 - [이신부의 세·빛] 허무한 두려움, 충만한 놀라움
  • 이기우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2-09-23 14:08:54
  • 수정 2022-09-23 14: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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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간 토요일(2022.9.24.) : 코헬 11,9-12,8; 루카 9,43-45


오늘 독서에서도 코헬렛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코헬렛’이라는 성서가 쓰인 기원전 3세기 당시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동방 지역을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문화적으로도 그리스식으로 동화시켜버린 때였습니다. 이 문화를 헬레니즘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리스 문화를 원천으로 하면서도 ‘길가메시 서사시’ 같이 힘을 숭배하는 고대 중동 공동의 정신문화 유산의 영향도 수용하고 ‘아멘엠오페의 지혜’라고 불리우는 이집트의 무신론적인 정신문화도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주 개방적이면서도 우상숭배적인 성향을 띠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섬겨온 유다이즘이 희석되어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코헬렛의 실질적인 저자들인 유다의 원로 현인들은 밀려들어오는 무신론적인 외래 사조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유다 젊은이들과 후대 유다인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유다의 신앙적인 전통 지혜를 솔로몬의 이름을 빌어 전하고자 했습니다. 


개방적이면서도 우상숭배적 성향은,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하는 내용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이즘의 영향은,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같은 구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유다이즘의 결론을 보여주는 코헬렛의 이러한 사상은 이 세상에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극적인 반전을 이룩합니다. 바로 십자가 수난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군중의 반응을 전하는 오늘의 복음도 단편적이라기보다는 총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 반응은 이스라엘의 평균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께서 드디어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온통 허무로 가득차고 희망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이 유배 귀환 이후 4백 년 이상이나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던 역사적 상황이었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예수님 당시는 민족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암울했던 이스라엘에 드디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도저히 일으킬 수 없었던 기적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메시아로 대하기보다는 그 고통스럽고 지겨운 로마 통치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강력한 지도자로 나서주기를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으로 하여금 현세적 메시아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도록 하셨습니다. 즉,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루카 9,44)이라고 딱 잘라 말씀하심으로써 수난을 당하는 당신의 운명을 예고하신 겁니다. 높아진 기대에 찬 물을 끼얹는 듯한 이 말씀에 대해서 군중은 물론이고 제자들도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처음의 놀라움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놀라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에 담긴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뜻을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얼마나 싸늘하게 가라앉았던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불의하고 부당한 체제, 즉 로마 제국의 군사적인 식민통치와 이에 빌붙은 친로마적이고 굴종적인 종교체제, 그래서 사실상 우상숭배적인 상황을 타파하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독립과 유다이즘의 부흥을 이루어 줄 현세적 메시아가 너무도 절박하게 요청되고 있었던 상황이어서 그러했습니다. 


이런 현세적 메시아에 대한 열화와 같은 기대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딴청을 피우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정색을 하시고 머지않아 닥칠 당신 수난의 운명을 선언하듯이 꺼내셨던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선언이 훗날,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들의 제1구원명제가 되어 있습니다. 


바라는 바 소망이 간절하고 기대가 클수록 이 소망과 기대를 기도하는 당사자들은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전제하고 나서야 그것이 실현되는 만고불변의 이치를 이 말씀은 담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시에 현실적으로 절박했던 현세적 메시아 사상은 자기희생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만,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실존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우리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부활의 현실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앙은 십자가 신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살며 일하고 기도하는 곳마다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나아가는 길에 십자가가 나타날 때에 놀라서는 안 됩니다. 두려워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은 부활이 없는 공허한 상황에서나 어울리는 것이고, 놀라움은 십자가로 인한 부활을 기대하는 상황에서 어울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면서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기도입니다. 머지않아 충만해질 부활의 기쁨을 기다리며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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