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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
  • 전순란
  • 등록 2015-07-12 11: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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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8일 수요일, 흐림


“여보, 내일 아침먹고 일찍 빵고한테 갈까요?” “점심 먹고 천천히 가. 나 할 일도 있고.” 아버지라서 엄마와 다른 걸까, 나는 아들이 빨리 보고 싶은데? 이탈리아 들어온 지 벌써 열흘인데 서운해 할 것 같아 카톡으로 연락을 했더니만 아드님 말씀: “점심 드시고 천천히 오셔요.”


본당일을 도우러 온 아들, 더구나 온지 겨우 사흘짼데 이리저리 분주할 사목활동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아버지로서의 배려일까? (아들 전화에 오라또리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함께 섞여 들린다.) 엄마들의 사랑이 짝사랑임을 간파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늘 한 템포 느린 보스코는 안달도 않지만 상처도 늘 덜 받는다.


엊저녁 전화로는 빵고가 멀리 있는 본당신부님 부모님댁에 함께 가서 선풍기를 빌려오는 길이었다. 롬바르디아 날씨도 무척이나 더워 그 부모님이 에어컨이 설치된 아들 사제관으로 아예 피서를 오셨단다. 손님 신부 빵고가 잠이라도 자게 선풍기를 사러 시내를 온통 돌아다녀도 품절이 되고 없어 부모님댁까지 가서 가져오는 중이었다.




비엘라는 그곳보다 큰 도시 같아서 내일 아들한테 가는 길에 선풍기라도 하나 사다줄까 아침나절 시내로 나가 큰 가게란 가게를 10여 군데 돌았지만 단 한 대도 없었다. 기온이 이렇게 올라간 적이 없어 선풍기도 에어컨도 모두 동났다는, 점원들의 행복한 대답이었다. 세상에 선풍기가 동나고 없다니? 서울은 집집이 에어컨이 돌고 지리산도 방방이 선풍기가 돌아가는 터여서 느긋했는데...


어지간해서는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이 여름을 지내는 이곳 사람들의 인내심이 대단하다. 자동차도 에어컨 없는 차를 상상도 못하는 우리인데 여기선 없는 차가 보통이고, 더우면 그냥 창문을 열고 다닌다. 지긋이 참고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겠다.


오늘도 해거름에 산보를 나갔다, 오늘은 무짜노쪽으로. 길가에 ‘음식점 렝기’ (Trattoria Renghi)라는 간판이 있어 메뉴가 어떤가 보러 내려갔다. 건너편에 무짜노 공동묘지가 있고 두 할메가 철문을 여느라 고생중이어서 다가갔다. 


작은 동네여서 묘지 관리인과 여닫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 읍사무소에 들러 서명을 하고 열쇠를 빌려다 쓰고 돌려줘야 한다는 할머니의 설명. 동양인의 호기심을 눈치 챘는지 들어와 구경하란다.


▲ 해거름 산보길


▲ 시골 버스 정류장에 로마(685km)와 파리(753km)가 표기되어 있다니


자기네 집안사람들이 묻힌 구역을 한 바퀴 돌면서 일일이 인물평을 들려준다. “우리 영감은 저 사진보다 더 잘생겼었는데 사진이 잘못 나왔서.” “여긴 시동생인데 알콜중독으로 탈장이 돼서 쉰도 못 보고 죽었지 뭐유.” 그 옆에 꽃을 물고 웃는 남자의 사진. “그렇게도 바람을 피우며 마누라 속을 썩이더니만 누굴 꾈려고 죽어서도 꽃을 물고 있담.” “술쳐 먹고 마누라 패던 놈은 죽어서도 저렇게 얼굴에 다 써 있어.”


그 옆의 막달레나 아줌마. “생전에 늘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지. 모두에게 잘해줬고 어려운 사람은 늘 저 여자한테 젤 먼저 달려갔다우. 저이가 천당 간 걸 의심하는 사람은 동네에 하나도 없어.” “파비오는 서른여덟에 죽었어. 축구선수여서 무덤에 축구공을 해놨지 않수? 그 옆의 지노는 산사람(알피니스트)이어서 늘 산에 가서 살았지.” 고인의 사진은 등산가 복장을 하고 묘석도 산 모양으로 뾰쪽하게 깎아 세웠다.


스무명 가까운 친지들을 일일이 소개(?)해 주고 묘지를 나오면서 “다음은 내 차례라우. 아버지가 괴물이어서 우리 열세 형젠 실컷 얻어맞고 컸지. 하난 죽고 하난 죽어가고 다음은 내 차례고...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





유럽의 묘지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HODIE MIHI CRAS TIBI)라는 라틴어 금언이 입구에 붙어 있지만 거기 꼼짝없이 묻혀 동네 아줌마한테 각자 살아온 인생평(人生評)을 한 마디씩 듣고 있는 이들을 뒤에 남기고 우리의 산보길을 계속했다. 훗날 내 무덤을 지나가는 이들은 무슨 평을 내리며 손가락질 할까를 헤아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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