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은 정기적으로 인사발령이 있습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임지에서 3년에서 5년 정도 일을 하면 인사이동을 합니다. 도시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도시로, 때로는 대학, 병원, 사회복지시설 등 사제를 필요로 하는 곳에, 세상에 속해 있는 일이지만, 교회의 일을 하려 직무와 책임을 맡게 됩니다. 인사발령은 지역의 책임자인 주교와 총대리, 그리고 참사들의 의견이 더해져 내려옵니다. 신부들은 인사발령지를 받아들면 그저 짐을 꾸려 다시 자신의 소임지로 떠납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에는 식탁의 자리, 성당의 자리, 어느 자리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주마다 월마다 식탁 자리와 성당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방도 학기마다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든 자리에 집착하지 않는 연습을 양성과정에서부터 자연스레 하게 되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저도 여기저기 많이 옮겨 다녔습니다. 답동성당의 보좌신부로, 유학사제로, 교구청 신부로, 소래포구, 서창동, 용유동, 송림동에 이르기까지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부임한 본당에 사제관(사제생활관)이 되어 있는 곳은 한 번도 가보질 못했습니다. 유학생활 하는 내내 해마다 상황에 따라 기숙사를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월세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교구청에 갔을 때는 박문초등학교 교실 한 칸을 막아둔 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소래포구에 갔는데 성당도 없거니와 신자 집에 전세보증금 7천만 원에 들어가 6개월을 살았습니다. 첫 주임에 소래포구에 가서 성당을 신축하고 사제관 1년 살자마자 다시 강화도 갑곶으로 갔습니다. 시공사 대기업 건축회사가 부도가 나서 공사가 마무리되지도 않았고, 사제관은 침실도 침대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달을 준비해서 들어가 살 수 있었습니다. 서창동에서는 빌라에서 살다가 10년 동안 지하에 있던 성당을 2층으로 올려놓고 사제관 2주 살고 안식년을 가게 되었습니다. 안식년을 하던 한 해는 강원도 시골 컨테이너 창고 한 칸에 짐을 두고 살았습니다. 용유도에 들어가서는 시골 농가 신자 집에 잠시 머물러 살았습니다. 여기도 사제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당 옆 교육관을 칸막이해서 사제관으로 개조해, 만 4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송림동성당은 도착하니 한겨울에 보일러 바닥이 온통 깨져 수리하는데 한 달 걸렸습니다.
집이란 곳은 사람들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소중한 공간이고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공간이기에 사람들은 집에 대해 많이 집착합니다. 최근에 부동산 과열문제나 영혼까지 탈탈 끌어서 집을 사려 하는 청년들을 바라보며 그 마음을 이해할만 합니다. 그런데 집의 필요나 요구와는 상관없이 집이 투기의 대상이 되고, 자산을 축적하는 방법이 되어버려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는 집이 없고 여러 채의 집을 보유한 사람에게 얹혀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내가 머무는 곳, 몸과 마음을 두는 곳이 의미가 있고, 의미가 있게 해야 나의 삶은 향기로워지고 윤기가 날 텐데, 어느새 우리는 아파트의 메이커와 전철역과의 거리, 아파트 가격, 편의시설의 유무에 따라 살 곳을 결정하는 종속된 집살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가경제가 잘못된 부동산투기열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계속, 오래,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풍수
‘풍수’는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뜻인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인 말로, 생명을 불어 넣는 지기(地氣:땅 기운)를 살피는 것입니다. 풍수에 대해 과학적 또는 학문적으로 첫 번째 살펴보는 것이 산수인데 산과 물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으로 물이 흘러가는 입출구를 따져 뒤쪽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앞으로는 하천이 흐르는 곡구(谷口)나 산록 사면의 입지를 명당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풍수에서 중요한 명당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떠한 사람들이 살았고, 어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풍수만큼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풍수는 말 그대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인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살았던 사람들이 형편 없었거나 지금 형편없다면 아무리 좋은 풍수지리적인 환경인들 다시 바람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물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장 김병상 몬시뇰
제가 사제로서 여덟 번째 인사발령으로 온 곳이 송림동성당입니다. 송림(松林)동은 소나무들이 산에 많았다 해서 송림동으로 불렸다 합니다. 정조 13년(1789) ‘호구총수’에 송림이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전쟁 이후에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며 당시 무단으로 점유할 수 있는 지역은 구릉지나 산지들뿐이었습니다. 이때 황해도의 많은 피난민들이 송림동 구릉과 산지로 이주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송림동성당은 1955년 전쟁 직후에 생겨난 성당인데 수도국산이라 불리던 달동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은강’이라는 배경 만석동,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된 만석동 묘도(猫島)가 초장기에는 본당의 관할 구역이었습니다. 구한말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등 미국, 프랑스, 일본의 당시 유일한 수로관문이었던 현 화수동 128번지 일대가 본당 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화도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송림동 본당에서 첫 번째로 사제가 된 분이 김병상(金秉相. 1932년~2020년 4월 25일) 신부님이었습니다. 1977년 유신 헌법철폐기도회 사건 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신 이후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공동대표,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내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실업극복대책본부 이사장을 역임하셨습니다. 민주화, 정의, 민족, 경제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거침없는 발언과 실천을 하시면서도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으시던 그런 인자롭고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
동일방직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5대 방적업체 중 하나였던 동양방적 인천공장을 적산 불하받아 1955년 인천 동구 만석동에 세워진 방직 공장이었습니다. 인천지역은 60년대부터 꾸준히 민주노조 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산업화에 따른 급격한 도시화로 수도권 특히 인천지역 공장 노동자가 급증하였으나 당시 한국노총 중심의 어용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용자의 수족처럼 노동자를 억압하고, 민주노조 운동은 방직과 같은 경공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인천지역 민주노조 운동에는 개신교의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와 천주교의 인천 가톨릭노동청년회 등의 영향이 컸는데 여성 노동자 이총각이 지부장으로 당선되어 인천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간 곳이 송림동성당 일대입니다. 거기에는 김병상 신부님 같은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진 예언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 자매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던 평신도 이총각 선생님 같은 분들이 활동하며 살아 움직였습니다.
인혁당 사건의 진실과 J.시노트 신부님
인천교구 소속으로 송림동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사목하시던 시노트 신부님은 이후 주임사제로 발령받아 영종도·용유도·무의도 등 섬 지역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사목활동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다 1974년부터 민청학련 사건 등 군부 독재정권에 의한 인권 탄압이 심각해지자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미국대사관 직원과 중앙정보국(CIA) 정보원, 피해자 가족들을 통해 박 정권이 인혁당 사건을 조작한 사실을 알고 거리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1975년 4월 9일 새벽, 유신정권은 대법원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게 사형선고를 한 지 18시간 만에 8명을 전격 사형시키고 주검이나마 돌려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도 묵살한 채 고문 흔적을 감추기 위해 송상진·여정남 씨의 주검을 화장해버렸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소속수도회와 외국 언론을 통해 이런 만행을 세계에 폭로했습니다. 특히 사형장 앞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주검만이라도 돌려달라”며 외치다 경찰에 의해 끌려가는 그의 사진은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4월 30일 그를 강제 출국시켜버립니다.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그분은 김수환 추기경님을 거리로 불러낸 신부로 알려진 분이십니다. ‘동아투위’의 언론자유 투쟁도 적극 지지했던 시노트 신부님은 유신시대 한국 언론에 대해 “자신의 밥을 위해 진실과 약자를 외면하고 독재자와 타협이라는 편한 길을 택했기에 난 그때 신문사들을 ‘밥통일보’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사법개혁, 언론개혁의 선봉에 우뚝 서 계시던 시노트 신부님은 송림동성당 신자들의 기억 속에서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은 다르지 않습니다. 국민 주주운동으로 시작한 한겨레도 그러고 있으니 말입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김중미 작가, 조세희 난쏘공의 ‘은강’
IMF 외환위기 직후 ‘우리 모두의 가난’이 ‘나의 가난’으로 변하는 길목에서 『괭이부리말 아이들』(창비, 2000)이 나왔습니다. 김중미 작가는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가 난 이후 송림동 산동네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신의 가난과 사회적인 가난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무대 ‘은강’이 인천 동구 만석동 일대입니다.
“은강 노동자들이 똑같은 생활을 했다. 좋지 못한 음식을 먹고 좋지 못한 옷을 입고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오염된 환경, 더러운 동네, 더러운 집에서 살았다. 동네의 아이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더러운 골목에서 놀았다.” (『난.쏘.공』,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스물넷에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했던 작가는 송림동성당 청년회에서 자신의 작가적 역량을 키워나갔습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머리말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예전에는 세상을 바꾸지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 누군가와 동무가 된다.”
저는 김중미 작가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글로 이렇게 표현되었구나!’ 생각 했습니다. 그저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준다는 것, 말없이 함께 울어준다는 것. 곁에 있어 준다는 것의 소중함. 그것은 예수가 ‘모든 이들의 모든 것이 되어준’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김 작가는 가난을 아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 말하고 쓰는 작가입니다. 그렇게 동구 송림동, 만석동, 화수동 지역은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난한 지역에 커다란 성당이 생겨났습니다.
종교건축의 대가 이희태의 작품, 송림동성당
이희태 선생님은 광복 이후 활동한 우리나라 2세대 건축가입니다.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현대화하여 새로운 한국적인 양식을 창조했다고들 평가합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혜화동성당’, ‘절두산 순교복자기념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혜화동성당'은 종탑을 현대화하고 기하학적 단순성을 추구함으로써 한국 교회건축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해 1955년 인천 송림동에도 같은 건축물이 완공되었습니다. 이희태 선생님이 추구한 교회건축은 ‘혜화동성당’(1955)과 같은 해 송림동성당(1955)에서 완성된 형태를 갖추는데, 두 성당은 기존 고딕 양식의 교회건축 형태에서 탈피하여 종탑을 분리하고 현대화하여 기하학적 단순성을 추구함으로써 한국 교회건축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기념비적 건물입니다.
송림동성당은 혜화동성당과 ‘데칼코마니’입니다. 종탑이 좌(혜화동), 우(송림동)로 배치되며 입구 회랑이 거의 동일하게 설계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건축가가 거의 같은 설계를 가지고, 같은 시기에 지었던 건물이 혜화동은 한국교회사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라 칭송받고, 송림동 성당은 철거의 위협에 도로폐쇄, 폐도, 인근마을 붕괴로 인한 공동체 파괴, 소음과 분진, 지반침하, 건물 누수 및 붕괴위험으로 몰리고 있으니 그저 난감할 뿐입니다. 이게 풍수가 아무리 좋아도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세상을 볼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면 그동안 가져왔던 지역에서의 역할이나 신뢰가 무너져 내릴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교회쇄신 평신도 신학운동의 출발, 우리신학연구소
우리신학연구소의 출발은 1990년 생겨난 ‘가톨릭청년신학동지회’와 ‘우리신학연구실’이라는 두 그룹의 가톨릭 청년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신학연구실’은 가톨릭청년성서모임에서 나와 성서운동과 천주교 사회운동을 결합하려던 청년들이 1990년 말에 성서교재 발간을 위한 연구작업의 구심점으로 창립했습니다. 1990년 2월, 평신도 신학운동에 관심 있던 가톨릭 청년들이 ‘가톨릭청년신학동지회’(신동)를 만들었습니다. 신동은 월례발표회를 중심으로 천주교 사회운동에 관해 연구해, 그 성과를 1991년 7월 무크지 『변혁시대의 교회』로 발간했습니다. 이후 1994년 1월에 우리신학연구소 창립총회를 열며 전 바티칸주재 한국대사 성염 선생님과 김수복 소장님을 중심으로 서울 연남동과 인천 송림동신협(송림동성당 출발) 3층에 사무실을 개설합니다. 당시 송림동 천주교회 청년회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과 고민을 했습니다. 이후 우리신학연구소는 호인수 신부님과 고 홍성훈 원장님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교회와 세상에 밥이 되고 약이 되는 교회진보언론을 시작합니다. 교회 언론사에 남을만한 일이었습니다. < 가톨릭신문 >과 < 평화신문 >으로 양분된 교회 언론은 변화하는 세상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거의 일방적이고 수직적으로 걸러진 정보들뿐이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인천주보’ 이명준 선생님의 글과 편집이 당시 교회로서는 진보언론의 시작이었을 수 있습니다.
송림동성당은 70주년을 맞이합니다. 이제 송림동의 골목길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지난 박근혜 정부시절 유정복 전 시장의 뉴스테이 사업 일환으로 ‘송림초교주변 환경개선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송림동 골목길에 모여 살던 사람들 많은 수가 아파트 입주 현금을 확보하지 못하고 ‘현금청산’ 하거나 소위 ‘딱지’를 넘겨주고 다른 동네로 이사 가게 되었습니다. 성당 신자들은 하루하루 줄어들고 아파트의 새로운 입주자들이 들어오면 송림동 공동체는 새로운 재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다니던 관습도로는 모두 폐도 되었고, 아파트 빌딩 숲에 갇혀 버렸습니다. 이제 소나무숲 성당, 송림동성당이 아니라 아파트 숲 성당이 되어 버렸습니다.
70년 전 송림동성당 공동체는 우리 사회 변화를 주도했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던 예수의 제자 공동체였습니다. 이제 ‘고희(古稀)를 앞둔 성당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두보의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70세까지 장수하는 것이 드물다’라는 뜻이라면, 송림동성당도 70에 이르면 장수하는 참 드문 성당일 것입니다. 인천에서는 그래도 두 번째, 세 번째 생겨난 성당이니 말입니다. 풍수가 참 좋은 성당입니다.
이 글은 <공동선> 2021년 7-8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