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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의미 하느님의 의미
  • 임 루피노
  • 등록 2015-07-08 12:03:23
  • 수정 2015-07-08 14: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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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느님을 “말씀”이라고 칭한다. 절대 존재를 향한 무수한 호칭들 중 하나이겠지만, 많은 것을 성찰하게 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말씀은 단순히 “언어” 혹은 “글자”를 뜻하지는 않는다. 언어나 글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어떤 생명력, 그 자체로 살아있으며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을 말한다.


언어, 혹은 글자가 그렇듯 살아있는, 살아있게 하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말씀”이 된다. 말씀은 우리 안에 가장 내밀한 생명이고 심장이다. 우리를 만든 힘이며, 우리를 만들어가는 힘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전해준다.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빛이 생겨라!”는 언어 혹은 문자가 빛을 생겨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빛이 창조되었다는 의미다.


언어와 문자가 그런 힘, 창조력과 생명력을 담고 있을 때, 그것은 “말씀”이 된다. 어두운 밤, 허공에 대고 그저 “빛이 생겨라!” 수십 번 외친다고 해서 빛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강론대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수백 번 선언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렇게 말을 되뇌기만 해도 빛이 생겨난다고 가르치거나, 그렇게 실천 없이 선언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면, 말씀은 실종되고 거기 담긴 생명력과 창조력도 그와 함께 증발되어버린다. 결국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언어, 문자는 그 어떤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 채 길바닥에 내버려지게 된다.


“약속합니다.”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말을 던진 이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때, 한 사회 안에서 그 누구도 약속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때, 이 말은 아무런 존재의미를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상대를 모욕하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사랑하지도 않는데도 고백을 할 때, 언어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존재를 모두 어둠으로 오염시키는 파괴력을 갖게 된다. 이렇게 언어의 의미를 빼앗고 말씀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하느님을 반대하고 하느님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동이다.


예수께서 풍랑이 심해서 떨고 있는 벗들 사이에서 주무시다가 일어나, 바람과 천둥을 꾸짖자 호수가 잔잔해졌다고 복음서저자는 전해준다. 예수께 어떤 초월적 능력이 있어서 자연현상까지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었음을 전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힘을 잃어버린 언어가 본래의 의미와 창조력을 되찾아 말씀이 되었다는 표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라는 예수의 말씀에 벌떡 일어나 걸었던 어떤 중풍병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표징을 읽을 수 있다. 태초에 “빛이 생겨라!”하셨던 그 말씀의 창조력이 예수를 통해서 다시 회복되었음을 복음서저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는 끝까지,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구원)을 증거한 말씀이신 성자이신 것이다.


그런데, 왜 성경저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전했을까? 당시의 종교가 구원의 “말씀”을 오염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거대한 체제가 되어버린 종교가 먼저 말씀을 타락시켜서 그것을 아무 의미도 힘도 없는 단순한 음절이나 글자로 길바닥에 폐기시켜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는 말씀, 아니 “하느님”이라는 거룩한 이름 그 자체까지도, 사실은 종교가 오염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통해서 회복되는 말씀 본연의 거룩함을 강조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복음서의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칭호 그 자체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 말의 의미를 회복시켜 “말씀”을 되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분으로 그려진다. 구원을 약속하신 하느님,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이름에 원래 위치를 되찾아 주는 분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중풍병자가 예수를 통해서 구원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하느님”도 구원되는 것이다.


중풍병자를 죄인으로 취급하며 내팽개친 종교로 인해 오염되고 폐기되었던 (그래서 그저 음절과 소리로서만 남아있던) “하느님”이, 목숨을 건 예수의 연대로 인해서 그 순간 거룩하고 살아있는 “말씀”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이 다시 숨을 쉬게 된다. 그렇게 예수는 가난한 이의 심장 안에 하느님을 되살리는 (성자이신) “말씀”이 되신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천주교인사들의 반민족적 친일행적도 실려 있다. 그중 성직자로서는 대주교님이 한 분 계시는데,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1939년)과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1940년), 그리고 ‘국민총력조선연맹’(1941년)의 이사/이사장/평의원을 맡으면서, 친일시국강론과 미사 후에 단체로 신궁과 신사를 참배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고 한다.


경성교구장으로서, 일본군의 무기조달을 위한 헌금 독려, 매일 아침저녁기도 후에 일본군의 필승을 기원하는 기도를 바치도록 통지하신 일뿐만 아니라, 청년신자들에게 일본군에 적극 지원하고 모든 신자들이 일본제국의 2등 국민으로서 철저히 충성할 것을 강조하시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거의 20년 동안 서울교구장으로 봉사하셨다.


이것은, 전체 민중이 제국의 착취로 인해 고통 속에서 허덕일 때, 종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민중의 생명과 “하느님”이라는 이름과 구원의 “말씀”을 한낱 쓰레기로 취급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러한 반(反)-“말씀”적이고 반-하느님적인 실천은 70여년 전, 나라를 빼앗겼던 그 시절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자녀를 국가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잃었는데도 존중과 애도를 받기는커녕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수백 명의 부모들이 있다. 자본권력과 국가권력의 폭력과 폭압에 짓눌려, 마치 중풍병자처럼 온몸이 뒤틀린 채 바닥에 누워있는 형제자매들이 있다. 아니 너무나 많다.


주류 언론들과 매체들에서는 거짓과 위선의 언어들이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사이비 단체들이 자기들 세상인양 소리를 내고 있다.


2015년 7월 오늘, 어쩌면 “말씀”은 생명력과 창조력, 그 구원의 힘을 모두 빼앗긴 채, 그저 음절과 소리로서 껍질만 남아 길거리에 비닐봉지처럼 버려진 것은 아닐까? 어쩌면 하느님과 복음은 그렇게 “구원 받지 못한 채”, 자본가들과 권세가들의 차바퀴 밑에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민중의 생명을 천대하고 이용하는 이들 앞에서 예수의 목소리(말씀)를 내지 않는, 아니 더 나아가 자본과 권력의 편에 선 종교인들의 발바닥 밑에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2천년 전 그 옛날뿐 아니라, 70여년 전 일제강점기 때뿐만 아니라, 바로 오늘날에도 하느님과 “말씀”은 그 본래 의미와 구원의 힘을 박탈당한 채 버림받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버림받은 하느님을 연대로써 되살려야만 한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임 루피노 : 작은형제회 소속으로 서울에 살고 있으며, 수도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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