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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12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7-01 10:57:17
  • 수정 2015-08-20 12: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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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6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7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9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11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1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가 4,1-13)



같은 이야기가 마르코와 마태복음에도 있다. 세 번 유혹은 충분한 유혹을 뜻한다. 악마의 둘째 질문과 셋째 질문의 순서가 마태와 루가에서 바뀌었다. 근동 지역에서 마지막 유혹이 가장 크고 중요한 유혹으로 여겨졌다.


루가에서 예수는 세 번째 유혹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받는다. 예루살렘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루가이기 때문이다. 루가는 권력 문제를 예루살렘에서 다루기 싫어한 것 같다. 그래서 권력 유혹은 두 번째 장면에서 다루어졌다,


루가는 유혹 이야기에서 산을(마태 4,8) 언급하지 않았다. 도시의 신학자 루가에게 산은 예수 삶에서 중요하지 않다.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하던 루가 공동체의 입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악마가 떠나간 후 천사가 예수를 시중드는 이야기는 마태에 있지만 루가에 없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길을 걸었지만,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예수는 요르단강에서 사막으로 갔다. 사막에서 요한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고, 예수는 악마의 소리를 들었다.


마치 두 신학자가 성서 논쟁을 하는 것 같은 장면이다. 어용 신학자와 진짜 예언자가 끝장 토론을 하는 장면 같다. 예수는 악마의 질문에 자기 말로 답하지 않고 세 번 모두 공동성서 신명기를 인용하여 응수한다.


악마는 성서를 인용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다. 성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성서를 이용하는 사람은 악마에 가깝다. 악마도 성서를 이용할 줄 안다. 종교인의 탈을 쓰고 악마 노릇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과 약속을 기억하는 신앙인으로 소개되었다. 동족의 역사와 운명을 기억하고 다짐하는 예수의 모습이다.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기억하듯이, 교회는 자신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자랑스러운 역사뿐 아니라 부끄러운 역사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는 교회는 주님의 참된 교회가 아직 아니다.


1절 ‘성령으로 가득 차’ 표현은 예루살렘 7인(사도행전 6,3), 스테파누스(사도행전7,55), 바르바나(사도행전 11,24)에도 나온다. 유혹이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 생겼음을 가리킨다. 40일은 실제 숫자가 아니라 상징적인 신학적 숫자다. 모세는 40일을 밤낮으로 시나이산을 올랐고(탈출기 34,28), 엘리아도 그랬다.(열왕기상 19,8)


5절에서 악마가 예수에게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줄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었는가. 둥근 지구에서 그런 장소를 찾기는 불가능하다. 루가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악마의 시험은 예수의 정치적 힘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루가는 독자들에게 예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님을 여기서 알려주고 있다. 6,7절에서도 왕이 신하들을 시험할 때 쓰는 표현이 나온다.


루가는 정치신학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교체와 권력숭배라는 악마의 유혹을 예수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예수에게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봉사다. 예수는 권력을 비판하였지 권력을 쟁취하려 애쓰지 않았다.


권력을 탐하는 종교인은 예수와 반대 길을 걷는 사람이다. 예수가 유일하게 탐낸 권력은 십자가라는 자기희생의 권력이었다. 한국의 여느 시골 성당 사제도 당연히 누리는 일상적인 권력조차 예수는 단 하루도 누린 적이 없다.


9-12절에서 권력을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하는 문헌은 성서 밖에서 찾기 어렵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에게 충격이다. 하느님의 구원행동을 역사에서 자주 체험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을 자주 시험하곤 하였기 때문이다.(민수기 14,22; 시편 78,19-; 106,12-14))


거룩하게 산 유다인이 의로운지, 충실한지, 하느님을 존중하는지 시험받았다. 이방인이나 죄인은 유혹받지 않았다. 아브라함(창세기 22,1), 사막에서 이스라엘 민족(탈출기 15,25), 요셉(역대기하32,31), 욥을(욥 1,6-) 유혹하는 분은 하느님(창세기 22,1; 탈출기 15,25)이었다. 모세는 율법과 계약 때문에 사막에 머물렀지 유혹받느라 사막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가짜 예언자들(신명기 13,2-4), 이스라엘에 남은 이방인(판관기 2,22) 등 다른 사람을 시켜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충실함을 시험하였다. 붓다나 짜라수트라도 유혹받았다고 전해진다. 활동 초기에 유혹받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고대 여러 문화에서 풍부하였다.


하느님께 시험받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께 이미 선택받았다는 증거다. 선택되지 않은 사람은 시험받지도 않는다. 박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나 박해받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나라를 충실히 선포하고 실행하는 사람만 불의한 세력에게 박해받는다. 엉터리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권력은 역사에 없었다. 박해에서 면제된 사람은 자기 신앙을 부끄럽게 돌아볼 일이다.


하느님도 사람을 시험하지만 사람도 하느님을 자주 시험한다. 하느님이 사람을 시험하는 것보다 사람이 하느님을 더 자주 시험하는 것 같다. 요즘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하느님을 자기 비서 정도로 부려먹는 성직자들이 드물지 않다. 자신을 하느님 위치로 자리매김하는 사람들도 있다.


첫 번째 유혹이 예언자가 받는 유혹이라면, 두 번째 유혹은 정치적 유혹이다. 성전에서 일어난 세 번째 유혹은 성직주의 유혹이다. 유혹은 성전 안에서도 일어났고, 오늘도 생기고 있다. 종교인이라면 이미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가장 신성할 것 같은 성전 안에서, 다름 아닌 성당과 교회 안에서, 권력의 유혹과 돈의 유혹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돈과 관계없는 유혹은 종교에도 어디에도 없다. 정치와 경제는 어느덧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판가름하는 무대가 되었다.

예수의 신분을 두고 유다교와 논쟁을 벌이던 초대교회 상황이 오늘 단락을 낳은 배경이다. 오늘 그리스도교는 누구와 논쟁을 벌여야 하는가. 지금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 무엇을 증거 하라고 요구하는가. 그리스도교는 무신론과 다투는가. 세상의 가난과 다투는가.


성서와 교리에 대한 합리적인 해설을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에 목마르게 바라고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과 역사의 희생자들을 교회가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보고 있는가. 돈과 권력을 대하는 태도가 종교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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