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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 함께 기록되는 교회사
  • 지성용
  • 등록 2020-03-06 12:35:33
  • 수정 2020-03-06 14: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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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병원체의 등장으로 국제사회가 시끄럽지만, 돌이켜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병원성이 높은 생명체가 지구에 존재한다.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등장시킨 생물체로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보다 유전자 크기가 훨씬 크고 복잡하며, 신속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일부 오지를 제외하고는 지구 널리 퍼져 있다. 그 생명체 이름은 인간이고, 이들이 지닌 이성과 욕망으로 생태계는 교란되고, 그들의 비이성적 두려움과 불안 및 무지는 이 병원체가 지닌 병원성의 동력이다.” (우희종, 경향신문 2020년 2월3일)

 

데이비드 콰먼의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에 따르면, 1981년 이후 인수공통 감염병에 걸려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2,900만 명에 달한다. 농업과 정주생활로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전염병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질병은 동물들의 가축화에서 세균이 사람들에게 옮겨오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자연선택과정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면역체계가 강화되었고 병원균도 진화하였다. 인수공통 감염병은 대부분 인간의 침투, 동물과의 접촉, 바이러스의 변형, 인간 감염의 순서로 일어난다. 그러니 사실 동물만이 원인은 아니다. 인간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 인간은 전염병의 원인을 원숭이, 박쥐, 들쥐 등 야생 동물들에게 돌리지만 실상 인류가 동물들의 서식지를 침범하고 때로는 야생 동물들을 가축화시키면서 동물과 인간의 접촉이 바이러스의 변형으로 인간에게 치명적인 감염 바이러스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문제는 사실 인간에게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질병의 역사이자 질병에 대한 극복과 좌절의 역사다.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고통 가운데 질병만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류를 괴롭혀 온 것이 없으며, 또 인간의 노력 가운데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울인 것만큼 지속적인 활동도 찾기 어렵다. 질병은 생명체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인류보다 몇 백 배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기존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 중심으로 자연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바이러스 등 여러 생명체가 적응하는 과정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질병의 역사는 생물의 역사이자 지구의 역사이며 인간사회와 문명의 역사였다. 인간들이 겪는 질병의 바탕에는 자연사적인 측면도 있지만, 인류가 문명을 이룬 뒤에 더 중요하게 작용해온 것은 이러한 질병, 전염병, 바이러스의 공격이 세계사 그리고 교회사 안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발생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페스트 유행과 교회의 성장


▲ Arnold Böcklin < The Plague >


페스트(흑사병)가 인류 역사상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역사적 기록으로는 6세기 독일과 동로마제국에서 페스트가 창궐한 것으로 추정된다. 페스트의 만연은 로마제국의 멸망을 재촉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그리스도교 국가 칙령’을 선포한지 10년 후인 391년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식 결정한다. 이후 395년 테오도시우스의 사망 이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고 서로마는 5세기경 게르만, 프랑크, 서고트, 반달 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서로마가 멸망에 이를 무렵 유목민족들이 로마에서 활보하기 시작하며 대규모 페스트가 유행했다. 6세기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황제시대에 처음 발생하여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라고도 불렸던 이 전염병은 유럽 전역에서 1억 명에 가까운 목숨을 앗아갔으며 반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많은 원인과 분석들이 있지만 공통되는 중요한 지점은 도시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도시환경이 매우 불결했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인구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는 측면이 질병의 전파와 감염의 경로로 추정되었다. 의학은 페스트에 속수무책이었다. ‘세상의 빛’이라고 불리던 철학도 이미 그 존재의미를 상실했다. 페스트는 도시 전체를 말살시킬 만큼 위협적이어서 비참한 상황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시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돌아갈 곳도 잃어버렸다. 거리의 노숙자들은 전염병의 공포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누구도 이성과 과학으로 질병의 과정을 연구하거나 설명하지 못했다. 


이때 오히려 그리스도교회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며 이전과는 다른 세계관, 종교관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즉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은 ‘저 세상’ 천국이며 이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신앙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심판, 천국, 죽음 등의 개념이 이원론적 세계관을 더욱 공고하게 했고 체계화되고 강화되기 시작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영향으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여 사고하기 시작했으며 병으로 무력해지는 육체를 경멸하는 흐름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채찍질 고행단의 행렬`(Procession of Flagellants).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 자신의 육체에 고통을 가해 하느님의 참회를 받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대의 그리스도교 영성가들은 육체가 영혼의 선행을 방해하면 죽음에 이른다고 강론했다. 인간은 죄를 씻기 위한 목적으로 사는 것이며 질병은 악에 대한 처벌이므로 누구나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복음은 빈부, 신분, 인종,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질병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교도의 의학이 무시무시한 전염병 앞에 속수무책일 때에도 그리스도교는 자애와 사랑으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다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의학이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오로지 기도에 희망을 걸었다. 그리스도교의 선교사들은 가난한 마을과 오지를 다니며 영혼과 육체의 구세주인 그리스도만이 가장 고귀한 의사라고 전파했다. 선교사들의 이동과 함께 페스트도 함께 움직였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복음을 믿으면 질병과 장애, 고통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영하던 예식에서 신자들은 거룩한 성체를 감히 손으로 받을 수 없었고 입을 벌려 영성체를 받아 모셔야 했기에 사제의 손에는 사람들의 타액이 묻어 다른 이들의 입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질병의 원인을 묻는 행위조차 죄악에 해당하며 의사들의 약 처방, 수술 등과 같은 치료 행위도 신의 영역을 간섭하는 것이므로 죄악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였다. 페스트의 시작은 병으로 무력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학으로도 해결 불가능한 한계상황에서 ‘지금 여기’ 차안(此岸)이 아닌 ‘다음 저기’ 피안(彼岸)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페스트가 그리스도교를 선교했다’하면 큰일 날 주장이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고통에서 그리스도교회는 인류에게 ‘생명’의 희망을 던져주며 제 자리를 공고히 해 나가고 있었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교회가 번영하면서 의학도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8세기에 접어들어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가 궁정과 각지의 수도원에 신학원(schola, 스콜라)을 설립해 왕족과 귀족 자제들에게 ‘고전철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스콜라’는 이후 대학교육, 대학의 기원이 된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 교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포함되며 새로운 교회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중세교회 번영의 기초를 마련해 준 것은 다름 아닌 페스트, 아니 더 정확히는 페스트 앞에 무력했던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체험이었다.


십자군 전쟁과 페스트


8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1096~1291)으로 인한 끊이지 않는 전쟁은 주요한 페스트 확산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전쟁으로 죽은 군인들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어려웠고 폐허가 된 마을에는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검은 쥐들과 까마귀들이 파먹기 시작하며 페스트균은 땅과 하늘을 가로지르며 돌아다녔다. 십자군의 동방원정은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염병의 확산으로 수많은 민간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지만, 원정은 멈추지 않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동방에서 페스트에 감염되어 고향에 페스트를 확산시키는 주범이 되었다. 


페스트,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은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전염병 사건 가운데 하나였으며 세기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중세 초기에 시작된 흑사병은 유럽 지역에서 다시 1346년~1353년 사이 절정에 달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억 5천만 명~3억 7500만 명 정도로 거의 1억 명 이상이 줄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줄어든 세계 인구가 흑사병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는 데는 17세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되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1343년경 크림 반도에 닿았다. 거기서부터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 쥐들에 기생하는 동양 쥐벼룩을 기주로 하여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다시 시작된 흑사병의 유력한 매개체로 꼽혀왔던 야생 검은 쥐는 12세기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동안 쥐가 옮긴 벼룩이 흑사병의 주범으로 인식되어왔지만, 동시에 인간을 숙주로 삼는 이와 벼룩 같은 체외 기생충이 산업화 이전 유럽에서 전염병을 옮겼다고 보는 학설이 최근에는 보다 설득력을 가진다. 곧, 인간이 전염병 전파에 쥐보다 더 큰 감염의 매개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 자파의 페스트 병원을 방문한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


중세시대 사람들은 페스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초기에 개와 고양이가 페스트의 주범이라고 판단하여 막대한 국가예산과 인력을 동원해 개와 고양이를 잡아 죽였다. 그 결과 벼룩을 옮기던 매개체인 쥐가 더 창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유대인들에게는 페스트가 번지지 않았다. 이유인즉 그들은 구약의 정결례 예식에 따라 자주 손과 발을 씻어 병에 대한 예방을 할 수 있었고, 전염병이나 나병환자들은 가족이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동체 밖으로 격리시킴으로써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꾸로 독일 게르만 지역을 시작으로 ‘유대인들이 샘이나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대인 대학살을 불러왔다. 전염병으로 동족을 잃은 독일 게르만 인들의 슬픔이 유대인들을 향한 증오와 분노, 질투로 이어져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을 생매장하거나 화형 시켰다. 유대인 학살이 너무 확대되자 당시 교황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9월 26일 이러한 소문을 일축하는 칙서를 내리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멈추게 했다. 


14세기 페스트 유행은 유럽 종교사, 사회사,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스트가 한참이던 1347년부터 1380년 사이 교회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황제를 겸하고 있던 교황 아래 통일되어 있던 유럽의 이상은 주권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독립국가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독립을 요구하는 국가들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교회는 1348년 흑사병의 대유행 이후에 많은 성직자들의 사망으로 부족한 성직을 부도덕하거나 백성들의 지탄을 받는 사람들이 메우면서 교회와 수도원은 더욱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또한 흑사병으로 수많은 성직자들이 숨지면서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성직자들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등 자국어 기록이 늘어나면서 종교 안에서 ‘민족주의’가 싹트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는 이후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다. 


▶ 2편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 2020년 3, 4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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