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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태 신부의 오늘 미사 (15.06.28)
  • 이균태 신부
  • 등록 2015-06-28 11:42:34
  • 수정 2015-06-28 11: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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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황주일이다. 교황주일이라고 하니까,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오늘을 봉건시대나 황제시대처럼, 교황을 절대시하거나 교황을 영웅으로 미화시키는 날 혹은 지상에서의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자는 날처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 세계의 모든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인류를 잘 인도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교황님에게 주신 복음적 가난과 소박함에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동참함으로써 우리들 모두가 복음을 더 깊이 깨닫고, 복음이 가져다 주는 참 기쁨을 안고,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의 진정한 형제, 자매가 되어주며 언제나 어디서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하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 교황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과 죽어가는 딸아이를 가진 아버지, 그리고 12년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한 여인, 이렇게 세 사람이 주인공인 복음 말씀을 들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 사람은 생명을 포기할지 몰라도, 결코 하느님은 생명을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제와 그저께 미사 때에 들었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이야기, 그리고 로마 제국의 백인 대장의 종을 고쳐 주신 예수님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와 일맥 상통한다.


동네 안으로 들어오거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나타나면 돌에 맞아 죽거나 몽둥이 찜질로 맞아 죽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 나병환자는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은 나병환자와는 얼굴도 마주쳐서도, 그와 인사를 나누거나, 대화하는 것도 금지되었던 그 시절에 모든 금기를 깨고, 당신 역시 마찬가지로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만나고, 그의 썩어 문드러져 가는 몸에 손을 대시기까지 하면서 그를 치유해 주셨다. 목숨을 걸었던 나병환자와 똑같이 목숨을 걸었던 예수님의 만남, 거기에 소통이 있었고, 거기에 구원이 있었다.


중풍으로 몹시 괴로워했던 종을 위해, 자기 말 한마디만 던지면, 부하들이 예수를 자기에게 데리고 올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로마제국에 자발적인 복종을 해대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라는 작자를 자기에게 데리고 오라고 명령만 내리면 얼마든지 편하게 예수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백인대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완장 하나 찼다 하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그 시대에, 그것도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던 장교가 식민지배를 받는 일개 백성에 지나지 않는 예수라는 유대인에게 « 주님 »이라는 호칭까지 사용하며, 이 백인대장은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다.


그 뿐인가? 이 백인대장은 중풍이 나서, 집에 드러누워 있는 종, 소모품에 불과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는 자기 종을 폐기 처분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종을 낫게 해달라고 예수에게 다가가 간청하기까지 했다.


백인대장은 종을 물건 취급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으로 여겼던 것이다. 거기에다 예수라는 인물도 유대인이었으니, 당연히 유대인으로서 로마 군인에게 적개심이나, 증오심이 있었을 텐데, 자기 사람 하나 살리기 위해 자기를 미워할지도 모를 그 예수라는 유대인에게 다가가, 공손히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기득권들을 다 내어 던지고, 오직 자기 사람 하나 살려내기 위해서, 식민지 백성에게 무릎 꿇다시피 하며, 공손히 도움을 요청하는 백인대장과 그 백인대장의 마음을 알아보고는, 로마제국 앞잡이라고, 적군을 도와주는 매국노로 오해를 받아도 싼 말씀과 행동으로 응답하는 예수님, 이 둘 사이에 흐르는 소통이 결국은 중풍에 걸린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게 하는 치유의 기적, 바로 구원을 이루게 했다.


목숨을 걸었던 나병환자의 진정성에 똑같이 목숨을 거는 하느님의 아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이 참으로 아름답다. 모든 기득권을 다 내팽개쳐버리고, 오직 자기 사람 하나 살려 달라는 백인대장과 로마 제국의 개로 전락했다는 오해와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주는 예수님의 만남과 그 만남이 일구어 내는 기적이 참으로 아름답다.


한 두 해도 아니고, 무려 12년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한 여인, 부정한 병, 더러운 병이라고, 마을에서도 사람들과 함께 살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모인 곳조차도 제대로 갈 수 없었던 그 여인, 병으로 고통 받는 것만 해도 서러운데, 사람들로부터 소외 받고, 냉대 받고,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지경에 처한 그 여인이 죽기 살기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치유를 받았을 때, 그 여인의 믿음과 그 여인의 말과 행동에 오히려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예수님의 그 소통이 참으로 아름답다. 


오늘날로 치면, 본당 회장과도 같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회당장 야이로는 죽어가는 딸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신분도, 자신의 명예도 잊은 채, 이미 열심한 유대교 신도들로부터, 특히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로부터 좋지 않은 소문이 나 있던 예수님을 찾아 갔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이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회당장 야이로는 모든 것 다 내려 놓은 채 죽어가는 딸 자식 하나 반드시 살리고자 하는 평범한 아버지가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회당장을 만나는 일이 그리 내키지 않았을 예수님도 야이로의 마음을 읽고, 그의 딸을 죽음에서 다시 소생시킨다. 회당장 야이로와 예수님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기적이 참으로 아름답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저께, 어제 그리고 오늘 연이어 나오는 세 복음이 전하는 만남과 소통과 기적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고 이 불통의 시대에 오늘 복음과 어제, 그저께의 복음은 소통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참으로 소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 낼 수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


이 만남과 소통과 기적 이야기를 그저 2천년 전에만 일어났던,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그저 성경에나 나오는 이야기로 만들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 하소연할 길이 없는 억울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살기 위한 몸부림과 수많은 눈물과 헤아릴 수 없는 한숨과 절규, 그들이 겪는 고통 그 자체가 진정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분노하는 것이 교회가 드러내어야 할 예수님의 진정성이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당신의 사도좌 권고, « 복음의 기쁨 »에서 하신 말씀 두 대목을 인용하며 오늘 강론을 끝맺고 싶다.


친구와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병든이들,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 »(루가 14,14)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 분명한 메시지를 약화시키는 어떠한 의심이나 변명도 있어서는 안됩니다…우리는 우리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다는 사실을 주저없이 밝혀야 합니다. 결코 가난한 이들을 저버리지 맙시다.(복음의 기쁨 48항)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우리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에게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들 안에, 우리를 가혹한 심판관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습관들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우리의 문밖에는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르 6,37).(복음의 기쁨 4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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