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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의 쓰임새, 거룩함의 쓰임새
  • 임 루피노
  • 등록 2015-06-24 09:56:56
  • 수정 2015-07-08 11: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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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팀과 동반해서 이스라엘과 이태리 등지를 순례하다 보면, 매일의 미사 지향(미사 예물)이 많이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한 지향부터 병중에 있는 이들의 쾌유를 비는 지향, 그리고 자녀의 시험이나 취직, 더 나아가 사업의 번창을 위한 지향까지 있고, 시댁과 친정의 돌아가신 조상들을 기억하는 지향도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이른바 “가계 치유”라는 것 때문이라고 들은 적이 있으나, 약 2주 정도의 순례 기간 중에 거의 매일 계속해서 그런 지향이 많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좀 놀랐던 적이 있다. (사실 “가계 치유”라는 것이 가톨릭 교리에 부합하는 것인지 개인적으로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듯 많은 미사 예물의 다양한 지향들을 보면서, ‘미사의 쓰임새’, 혹은 ‘전례의 쓸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이 한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세상이 땅을 바라보는 관점, 세상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 그 한 가운데에는 “쓰임새”라는 개념이 있는 듯하다. ‘이것을 무엇에, 어디에 쓸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쓰임새의 질서체계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돈’으로 연결된다.


돈은 투자의 도구로 사용되고, 돈의 쓰임새는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보상으로 상환 받을 때 극대화된다. 사람을 볼 때, 땅과 자연을 볼 때 사용되는 이렇듯 자본과 쓸모(효용성)의 관점은 우리 사회에 매우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듯하다.


그것은 종교를 신앙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훨씬 넘어서 있는 일반 현상이다. 성당이나 절에 열심히 다니느냐 아니냐의 문제와도 별개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가톨릭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미사는 나의 필요에 대해서 어떤 효용성을 갖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돈을) 더 많이 투자하면, 그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미사(로 대표되는 교회의 전례 거행)는 효용성의 세계 안으로 포섭될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미사는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이런 질문은 미사를 넘어서서 하느님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 사실 미사에 대한 질문은 곧 하느님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가?” 다시 말해, 미사 지향을 넣고, 여러 번에 걸쳐 많은 금액을 봉헌하고 예물로 올렸는데, 내가 생각한 지향이 충족되지 않을 때,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가?”, 또는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더 나아가 “내가 하느님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그 하느님은 내게 무슨 의미인가?”


이렇듯 쓸모와 효용성이라는 가치체계(hierarchy)의 최고 위치에 있는 돈을 숭배하는 것이 한 사회의 보편적 관점이 될 때, 거룩함과 미사(전례)와 하느님을 보는 것도 그와 같은 방식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결국 질문은 “나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질문은 건성으로 던질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진심을 다해서 물어야 한다.


요컨대, 구유(말밥통)에 누워있는 가난한 갓난아기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 배고픈 수천 명의 군중 앞에 누군가가 나누려고 내어놓은 몇 덩어리 빵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하느님의 우람한 성전 앞에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개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


99마리의 건강한 양떼 앞에 길을 잃어 눈에 띄지 않는 새끼 양 한 마리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 하느님의 선을 실천하다가 결국 죄인으로 몰려, 나무에 매달린 채 목숨을 잃은 시골청년 예수의 시신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하느님이 결국 내 손 위의 작은 빵 조각이 되어버렸다면, 그 하느님은 나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또 그 빵이 되신 하느님을 내가 먹어서 하느님이 내 앞에서 사라져버렸다면, 그 사라진 하느님은 나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리고 또다시 이렇게 물어야만 할 것이다. 혹시 그 쓸모와 효용성의 관점이야말로, 돈이야말로, 우리를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닐까? 구원의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린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 관점에 입각해서 보는 것이 너무나 보편적이 되어버린 사회이기 때문에, 구유의 갓난아기, 어린이가 내놓은 빵 몇 덩어리,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개, 길 잃은 양 한 마리, 그리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은 선량한 시골청년을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고 무시하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결국 하느님을 쓰레기통에 폐기시켜 버리고, 황금으로 된 우상을 신전 위에 모시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서 그것을 우리의 구원이니, 다른 것은 상상도 하지 말라고, 종교가 예수의 복음을 읽었던 자신의 입으로 외치게 된 것은 아닐까?


지금은 말하자면 “우상의 시대”인 것 같다. 자신을 모두 바쳐 남을 구원하는 하느님, 그래서 자기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가난한 하느님은 이 “우상의 시대”에는 환영받지 못한다. 심지어 종교(인)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런 하느님은 현실에서 “쓸모”가 없다고, 아무런 실질적인 힘도 과시하지 못한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성사인 미사성제도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는 경시당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세상의 눈에 미사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고, 그렇듯 세상적인 쓸모가 없어야 하는 게 맞다. 하느님도, 하느님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관점에서 쓸모가 없고, 무력하며, 무지하고 가난한 하느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내 욕구, 쓰임새의 저울눈금에 맞춰질 수가 없다.


저 웅장한 성당과 가난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헌금을 하느님의 저울에 달아보자. 커다란 군중의 현실적인 욕구와 어린이가 내놓은 빵 몇 덩어리를 하늘의 저울에 달아보자.


거대한 권력과 자본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체제와 이유도 모른 채 수몰당한 304명의 목숨을 하느님의 저울에 달아보자. 아니, 단 한 명의 고교생의 목숨과 비교해 보자. 그리고, 내가 우상을 숭배하는지, 하느님(의 구원)을 숭배하는지, 한 번 스스로 돌아보자.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종교가 자신의 원래 목소리, 예언자로서의 목소리를 되찾고, 원래의 짠맛을 되찾으려면, 반드시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이름 없는 시골청년 예수가 ‘쓸모(자본)의 논리’에 중독된 이 사회에 던지는 구원의 화두일 것이다. 세상에 의해 쓸모없다고 내팽개쳐진 생명들과 끝까지 연대하라는.



덧붙이는 글

임 루피노 : 작은형제회 소속으로 서울에 살고 있으며, 수도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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