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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분이 부창부수(夫唱婦隨)와 부창부수(婦唱夫隨)를 번갈아 멋있게 살고 가셨다
  • 전순란
  • 등록 2019-06-12 10: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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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1일 화요일, 흐리다 오후 늦게 개다


▲ 6월 12일 한겨레 그림판 (사진출처=한겨레 권범철 기자)


이희호 여사님이 돌아가셨다. 언제나 곧고 청초한 대나무처럼 반듯하셨던 날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떠날 때까지 지키셨던 그 기개가 부럽기도 하고, 이제 하느님 품에서 먼저 가신 김대중 대통령님과 반갑게 만나셔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함께 기도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니 정말 그렇게 하실 분들이다. 우리나라 여성운동 제1세대를 대표하는 분이어서 내게는 더욱 존경스럽다. 두 분이 부창부수(夫唱婦隨)와 부창부수(婦唱夫隨)를 번갈아 멋있게 살고 가셨다. 


여사님은 울 엄마와 동갑이시다. 울 엄마는 아직 살아 계시고 내일 엄마를 뵈러 실버타운에 간다. 엄마가 많이 쇠약해지셔서 ‘어제 링거를 맞으면 오늘은 반짝하시다’는 호천이의 전갈. 그 나이가 되면 삶과 죽음이 그렇게 기쁜지 슬픈지 섬세하게 실감으로 느껴지지 않으시나보다, 늙어서 주름진 당신 피부처럼. 



쌍문동에서도, 문정마을에서도 누가 얼마동안 눈에 안 뜨이면 ‘편찮으시다’ 하고 그 뒤로 들려오는 소리는 ‘저 세상 가셨다’고 한다. 더구나 나이 80중반을 넘으면 늦가을 숲속에 우수수 낙엽 지듯이, 늦봄에 벚꽃이 하롱하롱 지듯이 슬픔도 여한도 없이 노인들은 순순히 가시고 이웃한 사람들은 고즈넉이 부고를 받아들인다. 오히려 임종이 미뤄지면서 애만 쓰시면 주변 사람들이 되레 안쓰러워하는 게 시골 인심이다. 자연과 함께 살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이치를 깨우친 마음들이려니….


빵기가 ‘서리태’, ‘들기름’, ‘참기름’을 챙겨 달래서 화계 방앗간에 기름을 짜러갔다. 가을이면 이웃집 마당에서 뜨거운 가을 햇볕에 잘 마르는 들깨나 녹두, 팥을 보면 꼭 먹을 일이 없어도 사두게 된다. 그 곡식을 사는 일은 그 농부가 여름내 고생한 땀의 가치를 알아주는 일이자 그 농사를 격려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울 가는 길에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도 주고, 간혹 빵기가 기름이라도 챙겨달라면 괜히 신바람 나서 곡식자루를 들고 화계 방앗간으로 달려간다. 그 또한 어미 된 행복이다.


▲ 유영감님이 이 골짝에서는 맨 꽁지로 모를 심었다. 주위가 온통 푸른잔디밭이 되어간다.


방앗간 아줌마는 ‘아드님이 오셨나 봐요?’ 라며 반갑게 날 맞아주고 알맞게 깨를 볶아 만나게 기름을 짜준다. 기름 짜는 사이 임연수 씨 매장에서 엊그제 본 서리태가 어찌나 좋던지 그걸 사러 달려갔다. 


읍내 가는 길에 유림 버스정류장에서 군내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두 아줌마를 함양버스 터미널까지 태워다 줬다. 한 명은 서울 서대문에서 왔고 한 명은 시카고에서 왔단다. ‘서대문 아줌마’가 미국에 가서 길을 걷다 ‘시카고 아줌마’를 만나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 집에 머물며 친구가 되었고, 이번엔 시카고 아줌마가 서대문 아줌마 집에 손님으로 와 두 달간 머물면서 대중교통으로 둘이서 국내여행을 하고 있단다.


시카고 아줌마는 외교관인 미국남자와 결혼하여 35년간 한국을 떠나 있어 말은 서툴렀지만 그 당시 지녔던 순박한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어 참 보기 좋았다. 겨울에 추우면 나더러 시카고 자기 집에 와서 두어 달 머무르다 가란다.



20여년 전 일이다. 안식년을 지내던 로마 카타콤바에서 시칠리아 아줌마를 하나 만났는데 시칠리아 사투리가 스페인말보다 더 알아듣기 힘들었다. 다만 그렇게 가보고 싶던 시칠리아 자기 집에 오라는 말에 염치불구하고 2주일간 갔다 왔다. 파도바, 볼로냐, 비엘라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어쩌다 찾아오라는 초대만 받으면 우린 염치불구하고 찾아가 친구가 되었다. (그래도 보스코와 내가 두 나라는 안 가겠다고 작심했는데 하나는 미국이고 하나는 일본이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가기 싫다’는 대답이다)


요즘 함양 ‘홍인외과’ 방모니카 부부가 알프스 돌로미티 지역을 여행하며 글과 사진을 올리는데 워낙 우리 눈에 익고 워낙 정든 곳이라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코르티나담페쪼 Cortina d'Ampezzo 주변의 토파네 Le Tofane, 파쏘 팔자레고 Passo Falzarego, 소라피스 SorApis, 크리스탈로 Cristallo 같은 명산의 경치와 사진을 올려 우리의 추억을 부채질했다.


어차피 인생은 나그네 길이고, 이 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결국 그 모두가 영원한 안식처에 들기까지 쉬엄쉬엄 함께 걷는 길벗 아닌가?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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