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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의 정신은 ‘정의’ 이전에 ‘사랑’
  • 이기우
  • 등록 2019-03-11 12:14:44
  • 수정 2019-03-11 12: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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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간 월요일 - 레위 19,1-2.11-18; 마태 25,31-46



오늘 말씀의 주제는 재판 또는 심판입니다. 레위기의 독서 말씀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당시에 워낙 불공정한 재판을 당해보았을 것이기 때문에 해방된 나라에서는 더 이상 그런 불공정한 재판이 저질러져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후에도 불공정한 재판 관행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는 율법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던 율법 학자들이 조상들이 전해준 종교적 전통을 소중히 한다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것을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공정한 재판을 강조하는 말씀 뒤에 따라온 말씀 한 마디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재판의 정신은 정의 이전에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있어서는 범죄가 저질러진 후에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을 주는 기능보다도 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고함으로써 죄악을 예방하는 기능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죄악을 예방하는 정의의 잣대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죄악을 저지르고자 하는 범행동기 자체를 생겨나지 않게 예방하는 기능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잣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법률이나 이에 의한 재판은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그것도 마지막 보루로 남아야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죽어서 하느님 앞에서 받게 될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최후 심판의 잣대 역시 정의 이전에 사랑입니다. 그것도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잣대에 따라서 우리의 내세 운명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사실만으로는 사람들이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옥 벌의 공포로 위협하는 메시지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심판자의 역할을 부여하신 바도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당신을 따른 제자들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최후의 심판 이전에도 심판자 역할을 맡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성령으로 믿는 이들을 다스리시는 때, 즉 성령강림 이래 지속되고 있는 지금의 교회시대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심판은 정의의 잣대로 사람의 행실을 판단하는 일이어서 이 일을 하는 역할은 세상의 법정에서나 최후의 하느님 법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법이라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는 역할은 극구 말리셨습니다. “남을 심판하면 같은 잣대로 너도 심판받을 것이니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통해 보여주신 근본적인 의미의 심판은 사랑의 잣대로 행하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배신하는 죄를 저지른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해 생겨난 상처를 지닌 몸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는 깨끗하게 제자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시며 사람들을 용서하는 책임까지 위임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비겁하고 옹졸했던 제자들은 용감하고 담대한 사도들로 완전하게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도, 그리고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 이전에 지금 여기서 행하기를 기대하셨던 심판자의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심판. 비단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온 사람들 모두 이렇게 용서와 자비를 받았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죽은 후에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사람들에게 별다른 영향력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여기서 행하는 사랑의 심판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아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와 인간 사회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만드는 데에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그 견인차 역할을 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사법질서를 스스로 농단했던 우리 사회 법관들이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 이즈음,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명성에 기대어서 선출되지 않고서도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누렸던 그 엘리트들의 허접함을 보고 있자니 더욱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걱정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의 선도적이고 심판적인 역할을 기대하게 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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