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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아직도 교회를 다니십니까?”
  • 김유철
  • 등록 2019-02-12 11:19:45
  • 수정 2019-02-15 16: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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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문을 두드리며 했던 고백문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라는 말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다시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라는 잡혀지지 않는 질문을 받고서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고 답했다. 부모의 입을 빌렸든, 스스로 말했든 그리스도인 모두의 공통 경험이다. 그것은 첫 다짐이며 마지막 유언의 앞당김이다.


“아직도 교회를 다니십니까?”라는 말이 유행처럼 세간을 배회하고 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비아냥거림이지만 그 말이 주는 무게는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장벽과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다중인격적인 태도가 불러들인 말이다. 최고의 선인과 최고의 악인이 동시에 머물고 있는 자신에게 물어보자. 부끄럼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법은 없다. 


갈릴래아 촌사람들이 주님 올라가셨다고 쳐다보다 혼쭐난 하늘을 우리는 아직도 쳐다보고 있더란 말인가?(사도1,11 참조) 그 하늘이 아니라 주님이 스며드신 사람들 가슴속의 하늘을, 일상의 실천 속에 녹아있는 하늘을, 더욱이 부끄러움과 숨기고 싶은 일들 안에도 담겨진 하늘을 보자. 


신앙을 청하고 그 신앙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고백으로 문을 두드린 것은 ‘나’였다. 천주교회를 다니는 ‘교우’에 머물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믿는 이(신자)’라는 이름을 가벼이 여기지 말 일이다. 


#2

영세기념일, 그 날 하늘이 나를 낳았다.


천주교인이면 누구나 세례명이라 부르는 ‘본명’이 있다. 사람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의인들은 그들의 이름을 하늘이 따로 정해주시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어지는 ‘본명’은 참으로 귀한 것이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는 하나만으로도 ‘나는 천주교인이다.’라는 선언하는 것이다.


“축일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속에 축하의 의미를 되새긴다. 주보성인과 나, 주보성인의 삶과 나의 삶. 그 속에 감사와 부끄러움이 동시에 담겨있는 것이다. 단순히 주보성인이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아니기를, 그 이름이 엉뚱한 부적으로 이용되지 않기를, 하느님께 청해서 주어진 성인의 이름으로 또 한명의 성인으로 살아가야하는 자각이 거듭해서 일어나는 것이 영명축일의 의미중 하나일 것이다. 


이름값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보성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또 다른 숙제이기도 하다. 성인의 삶과 죽음을, 그분이 하늘의 하느님을 어떻게 땅에서 일구고 살았는지 알아야 그 길로 갈 것이 아닌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깨닫는 것’은 교회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주보성인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영명축일만 축하받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성인께 물어보자.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말이다. 그 말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메아리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기나긴 뱃속 보살핌과 고통으로 세상에 나온 날을 우리는 생일이라 부른다. 생명은 그렇게 극진한 보살핌과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다. 태중교우란 말도 있지만 천주교인으로 세상에 나온 사람은 없다. 하늘에서 내려온 물로 머리를 적시며 이름을 받은 날을 기억하자. 하늘의 보살핌과 고통으로 세상에 나온 날을 ‘영세기념일’이라 부른다. ‘본명축일’에 묻혀 ‘영세기념일’은 멀리 떠나보낸 것은 아닌지. 영세기념일, 그 날 하늘이 나를 낳았다.


#3

사랑은 셀 수 없는 것



오래되었지만 “삼‧ 육‧ 구” 놀이가 유행한 적이 있다. 모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숫자를 세다가 3과 6과 9가 나올 때는 말이 아닌 손뼉을 친다든지 하는 놀이다. 나중에 그것이 진화(?)되어 다양한 놀이 방법을 선보였다. 현대인의 삶을 판단하는 대부분이 수량화 ‧ 숫자화 되어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딱 어울리는 놀이인 것 같기도 하다. 


하기는 그런 숫자 표현을 ‘디지털화’라고 애써 포장하기도 한다. 사람 사는 집을 나타내는 것도,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규정짓는 것도, 사람의 사고력을 드러내는 것도 모두 숫자화 되어 있지 않은가?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빨리 쉽게 판단하는 동시대인들의 습성인지도 모른다. 과연 현재 우리 주변에 셀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을까?


교회안의 신앙인들이 기도를 ‘수량화’하고 있다. 기도를 ‘세고’ 있다는 말이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를 염하는 것이 아니라 ‘셈’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열어 보이는 ‘자기 비움’이 아니라 끊임없는 목표달성의 도구로 되어 간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성직자나 교우들 간에도 서로 의미 있는 일을 앞두고 영적선물을 주고받는다. 누군가를 위한 영적선물!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미사와 영성체, 묵주기도, 희생봉사 등의 단어 옆에 놓여있는 숫자들을 보면 마치 선물 앞에 붙은 가격표 같은 느낌이 든다. 선물을 주면서 가격표를 붙이고 주는 사람도 있는가?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란 말 한마디면 충분하고 넘칠 것을 100번 했다고 해야 그 사람이 감격할까? 내가 하느님과 얼마나 만났는지, 나와 하느님과의 사랑을 공개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는 셀 수 있는 것보다 셀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모든 것을 수량화해도 우리를 ‘생명’이게 하는 공기와 물, 흙과 바람을 어찌 셀 것인가? 하물며 그 분의 사랑을, 하느님과의 대화를.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삶·예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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