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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서울에서 로마까지 도보순례를 하다니?
  • 전순란
  • 등록 2018-12-14 1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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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3일 목요일, 눈 온 뒤 흐림



커튼 사이로 눈이 왔나 살그머니 내다보니 아직 안 왔다. 날씨는 잔뜩 흐려 이대로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고… 보스코가 낮에 외출한다는데 우선 눈이 안 내린 것은 다행이다 싶다가도 서운하기도 한 게 어지러운 사람 마음. 그가 잘 미끄러지고 잘 넘어지는데 ‘겨울구두’를 지리산에서 못 챙겨온 내 소홀함을 후회하기도 하고… 그러다 아침 기도를 하는데 팝콘 자루 풀리듯 흰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제부터 프린터의 검은 잉크가 떨어졌다 걱정하더니만 가까운 방학동역 근방에서 프린터 잉크를 판다며 나더러 빨리 다녀 오란다. 눈이 저렇게 펑펑 쏟아지는 길을 체인도 없이 운전해 다녀오라니 야속도 하고, 어제 동네 컴퓨터 가게를 들르면서 잉크통을 가져가서 리필했으면 됐을 텐데 앞도 안 보이는 눈보라 속에 나더러 방학동까지 다녀오라니(‘똥개 훈련시키나?’) 서운도 하고…


무슨 서류인지 부지런히 자판기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서 ‘그래도 한살이라도 젊은 내가 다녀와야지’하며 암말 않고 집을 나섰다. 눈발 속에 북한산은 모습을 감추고, 기다리는 이 없는 벤치에 흰 눈은 쌓이고, 중년 여인 둘이 어린애들처럼 깔깔거리며 눈 속을 걷는 모습에 살아있다는 희열이 솟으며 발걸음이 빨라진다.


동네 ‘한주컴퓨터’는 젊은이들을 상대하기에 밤늦게까지 일하는지 아침엔 10시 반이 되어야 문을 연단다. 추위에 우두커니 서 있기도 그래서 시장길로 들어섰다. 한길에서 버스를 내려서 쌍문동을 오르는 찻길 하나를 두고 양쪽으로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마주보고 서 있다. 쌍방 2차선 도로를 가게들이 내놓은 물건들이 모조리 차지하고 차 하나가 겨우 빠져나간다. 


살아내는 게 의무이자 권리여서 누가 가게의 도로점유에 시비라도 걸라치면 생사결판으로 장꾼 전부가 덤벼드니 아무도 감히 뭐라 못한다. 그렇게라도 이웃으로 살아온 사십년지기들도 이제는 차츰 세대교체가 이뤄져 부모에서 아들 세대로 대물림 되고 가끔은 손주들이 가게 귀퉁이에서 꾸벅 인사를 해온다. 오늘은 눈 치우는 일로 모두 울력을 나서 그 길이 모처럼 활기차고 화기애애하다.


컴퓨터 가게 젊은 주인은 친절하게 잉크를 리필해 주면서 ‘에러가 뜰 때 까지는’ 같은 통에 리필해 써도 된단다. 새것이 4만원임에 비해 얼마나 싼가! 또 이 눈길에 방학동역까지 안 나가도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게도 살아가는 법을 이렇게 서로 공유한다.


문교수님이 주고 가신 세탁기가 지난번에는 프로그램 에러가 떠서 회로판을 교체했었는데 요즘은 배수펌프에 이상이 있다는 OE 문자를 띄우고서 자꾸 멈춘다. 그때마다 통속의 물을 받아내고 다시 돌리는 지경인데 오늘 기사가 와서 펌프를 갈고 갔다.


기계도 본주인과 머얼리 헤어지면 그리워 그리워 한 조각씩 병들어 망가져 가는 듯하다. 아니면 새 부품으로 바꾸며 본 주인과는 한 조각 한 조각 연을 끊는지… 한 해가 저물고 성탄과 연말이 가까우니 나 또한 문교수님 소식이 궁금하다. 인간미 없는 아파트를 떠나 개인주택으로 가시겠다는 마지막 이멜 이후에 소식이 없다.



보스코는 정동 프란체스코회관에서 3시에 이기영 교수가 주관하는 “지구생명헌장 2018 서울안” 발표회에 참석하러 나갔다. 수원대 교수님 단독으로 지구상에서 아예 ‘핵발전소’를 없애자는 “생명·탈핵 실크로드”라는 것을 걷고 있다. 한국→ 일본→ 동남아→ 인도→ 유라시아→ 유럽을 걸어서 2020년 부활절에 바티칸까지 혼자서 걸어가는 순례다(때때로 합류하는 동조자들이 있긴 하지만). 서울에서 로마까지 홀로 도보순례라니! 


지구상에 450개 핵발전소가 쏟아내는 핵폐기물만도 처리할 길이 영영 없고 미국 스리마일(1979), 소련 체르노빌(1986) 그리고 일본 후쿠시마(2011) 원전사고가 인류를 결국 어떻게 멸종시킬지 뻔하게 보이는 우려에서 소수 지식인들이 벌이는 탈핵운동이다. 



문재인정부가 우리나라에서도 탈핵을 추진하고 있긴 하지만 핵마피아들의 기승에 지구상에서 핵발전소를 없애자는 사람은 하도 소수여서 거의 광인이나 광대 취급을 받겠지만, 역사가 저런 광대들에 의해서 앞으로 굴러가니 이 또한 어찌하랴? 여하튼 이기영 교수는 인도 샤라바스티까지 걸어가 있다(수원대 복직으로 일시 귀국 중). 보스코는 그분들에게 보내는 격려사 한 마디를 위해서 나간 길이다.


올 크리스마스엔 아무것도 안 하리라 마음먹었다가 오후에는 달달한 포도주에 찍어먹는 ‘깐뚝치니’(cantuccini)를 구웠다. 과자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니 과연 성탄도 가까운 듯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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