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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Good News)를 노래하는 방탄소년단
  • 지성용
  • 등록 2018-11-05 12:21:55
  • 수정 2018-11-09 17: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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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청와대)


2018년 우리 사회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남북통일 이야기가 연초부터 시작되어 북한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을 통해 남한 땅을 밟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싱가폴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하여 백두산 위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손을 잡고 천지의 물과 한라산 백록담의 물을 섞어내는 의미심장한 전례예식을 진행했다. 국민들은 이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이 글이 출판될 즈음에는 ‘종전선언’과 ‘한반도 비핵화’가 이미 큰 뉴스가 될 듯하다.


사법적폐와 국정농단의 주범들이 검찰에 소환되고 전직 두 대통령은 부정과 부패 혐의를 피하지 못하고 중형을 선고 받았다. 한때 부정한 권력의 협력자들이 줄줄이 소환되며 법적 판단을 받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 김기춘 비서실장, 우병우, 조윤선을 비롯해서 대기업의 총수들도 검찰수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뇌물을 주고받은 자들과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특정기업과 특정인에게 유리한 조건과 기회를 주었던 부정한 권력들이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격세지감이다. 그래도 부족한 적폐권력을 청산하라는 국민의 열기는 식지 않고 타오른다. 


이러한 적폐청산의 흐름과는 다르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제주 난민 문제를 시작으로 젠더, 최저임금, 부동산 정책 등 그 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수많은 자극적인 이슈들이 매일의 뉴스로 다가오고 있다. 조갑제TV, 정규제TV 등 적폐권력에 기생하던 전직 언론들이 유투브 매체를 타고 수많은 가짜뉴스를 양산하며, 종편 방송에서는 쟁점과 본질을 달리하는 보도로 수많은 시청자들의 판단을 혼란하게 하는 공작이 펼쳐지고 있다. 


2018년을 사는 대한민국의 백성 민(民)들은 이러한 변화와 혼란의 세상 풍파 가운데서 존재를 위한 치열한 몸부림과 사유 그리고 세상공부에 여념이 없다. 국정농단의 파행을 회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는 헌법을 공부하고, 기무사의 문건을 들추어보며 군사력 배치 문제를 꿰뚫어 보기 시작했으며 국제정세의 급격한 혼란 가운데서 외교 안보의 중요한 갈등 구조와 이해관계를 파악하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금리인상이 우리나라 금융당국의 이자율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부동산 정책과 국내 경제의 당면 문제를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명박의 ‘다스’라고 하는 회사의 경영과 분식회계를 보면서 경제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세상 안의 교회


그런데 이러한 백성 민들의 치열한 삶 안에서 종교는 지금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가? 어떠한 백성 민의 언어로 그들의 상처와 혼란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이야기를 던지고 있는가!

 

2018년 한 해 동안 종교 안에서 세상으로 흘러나온 얘기는 성직자들의 성범죄, 교회세습, 조계종 총무원장의 거짓말과 비리, 교회 병원들의 무리한 영리추구, 교회 내 사회복지 시설들의 운영문제, 천주교 교구가 운영하는 골프장의 불법운영 문제 등 끊이지 않는 부정과 불공정, 적폐와 비리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와 방송사의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제목을 점령하고 있다. 지난 정권의 적폐청산의 과정에서 드러난 기성종교들의 협력과 부역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만든 부정과 불의에 많은 의식 있는 종교인들은 걱정과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라는 제대 위에서는 촛불이 켜지며 정의와 평화를 노래하고 새 하늘 새 땅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약자들을 위한 배려와 강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자고 소리치는데 정작 그렇게 해야 마땅할 성전의 촛불은 꺼지고 사람들은 서로 수군대며 목사를 신부를 스님들을 뒷담화의 소재로 올리고 있는 것이 한국 종교계의 웃픈 현실이다.   


필자는 요즘 한 사제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기도하고 있다. 격변의 한국 현대사의 한 복판에 섰던 사제의 회상과 고백을 한인섭 서울대 법대교수가 대담하여 적은 함세웅 신부의 시대증언 『이 땅에 정의를』(창비, 2018)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목차만 찬찬히 훑어보아도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쟁점과 사건들에 한 사제의 삶이 시대 순으로 얽혀있다. 


▲ 1987년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사진출처=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지학순 주교의 구속과 정의구현사제단, 인혁당사건 조작 폭로, 명동학생운동, 80년 서울의 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폭로와 6월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희노애락 한 복판에서 한 사제는 세상을 품은 영성으로 한 생을 살아왔다. 하느님의 사제 함세웅 신부는 언제나 세상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품으며 살아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는 중심에 서려고 하지 않았지만 역사는 그를 늘 불편한 중심으로 불러냈고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한국가톨릭교회의 성장세에 지난날 정의구현 사제단의 역할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2%의 교세로 기성종교 안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가톨릭교회가 군사독재정권과 사회 불의에 저항하며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청년학생들의 외침을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당당히 해냈다. 


2000년 대희년에는 전 국민의 10%가 가톨릭교회의 성원이 되어 세례와 견진 입문 성사에 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런 사제와 성직자들의 순수함에 매료되어 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며 성직과 수도회에 입문하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 참여는 국민들의 지지와 박수, 세상 안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과 내공을 보여 주었다. JOC(가톨릭노동청년회), 천주교 도시빈민 활동, 가톨릭대학생연합, 가톨릭농민회 등 평신도들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서도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과 희생으로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교회 안의 세상


그런데 지금 교회 안의 세상은 어떠한가! 대한민국 고난의 시기 사회운동을 주름잡았던 교회 내의 수많은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사라져갔다. 모두가 엠마오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의 총명함과 진보적인 생각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이제 교회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 시기 가톨릭교회의 추기경과 주교들 그리고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사회의 불의와 불공정에 저항했다. 강화도의 1968년 심도직물 사건에서는 임시주교회의를 통해 주교 14명이 서명한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성명서’를 통해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 주교들은 부당한 노사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에서는 1977년 4월 평신도 이총각 씨가 노조위원장에 선출되었고, J.O.C 인천교구연합회는 동일방직사건의 경위와 ‘똥물세례’를 고발하는 호소문을 발표하며 사제들을 견인하여 인천교구 사제들이 동일방직 노조원을 돕기 위한 헌금을 모금키로 하고 ‘이들을 도웁시다’라는 제목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주교단에서도 1978년 4월 8일, 성명서를 발표하며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부패한 군부독재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천주교 인천교구의 주교, 사제, 평신도들은 교회의 한 몸으로 투쟁하며 가톨릭교회의 신뢰를 높였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의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다. 


1987년 노태우의 기만적인 6·29 선언 이후로 진보진영이 길을 잃었다. 야권의 대통령 후보단일화 실패로 재야운동권세력이 사분오열되며 교회도 급속하게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된다. 보수 성향의 김남수(수원), 김옥균(서울), 이문희(대구) 주교와 이반 디아스 교황대사는 교회 내 강력한 보수카르텔을 형성했다. 1988년 초 김남수 주교가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임되면서 한국교회와 로마교황청간의 교량 역할을 맡고 있던 이반 디아스 대사는 “한국의 민주화는 유치원생 정도”, “데모크라시(민주주의)가 데모크레이지(demo-crazy)로 바뀌었다”는 발언을 해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와 동료 사제들은 자기 자리에 연연치 않고 감옥의 찬 바닥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하며 목숨 걸고 싸워왔으나 이후 사제단의 투쟁은 선과 악의 분명한 경계가 무너지고 예전 같은 위협적인 박해나 탄압은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일 보다는 광장에서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올라가는 일로 갈채와 조명을 받으며 유명세를 타는 사제들이 ‘정의’라는 말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교회 안에서 정의롭지 못했다. 제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빼내겠다고 덤벼들었다. 


인천교구 성모병원사태, 대구 교구의 희망원 사태와 가톨릭대학교의 부정과 비리, 대구 팔공산 골프장 문제, 충주성심맹아원에서 죽은 장애아 김주희양의 사인 은폐, 성가정입양원 은비의 사망사건, 청주교구의 사제폭행사건, 수단 선교지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까지 교회 내 불의한 사건과 교회 구성원들의 범죄를 은폐하거나 왜곡하는데 작금의 정의를 구현하려는 사제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대구교구에서는 평신도 임성무 선생이 교구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평신도희년에 고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정의로운(?) 어느 사제 하나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자리가 있고, 굳이 그런 말을 해서 인사권자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까지는 없겠다 생각하는 것 같다. 


최현숙씨가 한겨레에 기고한 ‘교회에 갇혀 모독당하는 예수’(한겨레 최현숙의 말쓰기, 2018년 7월15일)를 읽으며 나는 참 묘한 생각에 잠겼다. 


껍데기만 챙겨 천상을 웅얼대는 전례와 교회법에 예수를 가두고, ‘지극한 정성으로 받아 모시고 최상의 흠숭으로 경배하며 최고의 존경을 드리는'(소위 ‘성체 훼손’ 건에 대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입장문 중, 2018년 7월11일) 행태야말로, 예수 모독이고 성체 모독이다. 


최근에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이 말만큼 더 적나라하고 적확한 신학이 또 있었을까?


방탄소년단의 영성


▲ (사진출처=방탄소년단 페이스북)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 1위를 달리고 유엔에서 연설까지 했다니 무슨 일인가 하여 지인을 통해 그들의 소식을 들었다. 필자는 마치 그 옛날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 하여 많은 이들이 요르단 강으로 나가 요한의 연설을 듣는 장면이 떠올랐다. 입소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젊은 그들이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 ‘쩔어’를 먼저 들었다. “3포세대? 5포세대? 그럼 난 육포가 좋으니까 6포세대 / 언론과 어른들은 의지가 없다며 우릴 싹 주식처럼 매도해 / 왜 해보기도 전에 죽여 걔넨 / 왜 벌써부터 고개를 숙여 받아 / 절대 마 포기 you know you not lonely / 너와 내 새벽은 낮보다 예뻐 So can I get a little bit of hope? (yeah) / 잠든 청춘을 깨워 go” 


그들은 고통 받는 청년세대들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노래하고 있다. 방탄소년들의 노래는 절망과 좌절하는 이들에게 울려오는 희망의 굿뉴스(Good News), 복음이었다. 


어중간한 내 삶 / 20대의 백수는 내일이 두려워 참 / 웃기지 어릴 땐 뭐든 가능할거라 믿었었는데 /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사는 게 빠듯하단 걸 느꼈을 때 / 내내 기분은 컨트롤 비트, 계속해서 다운되네 / (...) / 니 꿈을 따라가 like breaker / 무너진대도 oh 뒤로 달아나지마 never / 해가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우니까 / 먼 훗날에 넌 지금의 널 절대로 잊지 마 / 지금 니가 어디 서 있든 잠시 쉬어가는 것일 뿐 / (...) / 우리가 그토록 기다린 내일도 어느새 눈을 떠보면 어제의 이름이 돼 / 내일은 오늘이 되고 오늘은 어제가 되고 내일은 어제가 되어 내 등 뒤에 서있네 / 삶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 그렇게 살아내다가 언젠간 사라지는 것 / 행복해지고, 독해지고 싶었는데 왜 자꾸 약해지기만 하지 계속 / 나 어디로 가, 여기로 가고 저기로 가도 난 항상 여기로 와 / 그래 흘러가긴 하겠지 어디론가, 끝이 있긴 할까 이 미로가 / 갈 길은 먼데 왜 난 제자리니 / 답답해 소리쳐도 허공의 메아리 / 내일은 오늘보다는 뭔가 다르길 / 난 애원할 뿐야 (방탄소년단, ‘tomorrow’ 중) 


그들은 상처받고 소외된 청년들과 공감하고 이해하고 치유하고 새로운 길을 떠나고 있다. 아니 청년들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상실감과 패배, 좌절과 절망으로 얽혀 있는 사람들의 삶을 노래하고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들은 강자에게 당당하며 약자들과 소외된 이들을 주목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오늘 같은 이천년 전의 어느 날 예수처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 11, 12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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