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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태 신부의 오늘 미사 (15.06.14)
  • 이균태 신부
  • 등록 2015-06-15 11:28:20
  • 수정 2015-06-15 11: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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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즈음에 나온 한국 영화 중에 « 친구 »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에 나오는 대사들 중에 몇몇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 너거 아부지 머하시노 ? », « 니가 가라 하와이 », « 마이 무겄다 아이가, 고마해라 » 등등.


살아 가면서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소식들을 가끔씩 접할 때면, 도대체 하느님이 어디 계신가? 예수님이 내 눈 앞에 계시다면, 예수님께 « 당신 아부지는 지금 머하십니까 ? », « 너거 아부지 머하시노? »라고 따져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지난 해에도, 올해에도 이 나라 이 땅의 백성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들의 공통점은 « 무책임 »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얼토당토 않은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놓고,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란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역사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서, 혹은 하느님이 이 세상의 죄에 대한 벌을 주기 위해서 악을 도구로 사용해서, 세상을 정화시키고, 세상의 모든 눈을 당신께로 돌려 회개하게 하려고, 결국은 모두 다 잘 되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이란다.


선한 일을 위해서 하느님이 악을 허용하신다? 선을 위해 악을 필요로 하신다? 말도 안 된다. 하느님께서 악을 선하게 이용하신다고 해서 악한 일이 갑자기 선한 일로 둔갑하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악은 여전히 악 일뿐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하느님의 뜻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간의 불순종과 세상의 타락과 반항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이 땅에서 꽃피우시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와 희망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삶 속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끔찍한 고통에 담긴 부조리와 모순은 결코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의 죽음과 같은, 도무지 보상받을 수도 없고, 회복할 수도 없는 고통을 두고서, 하느님의 뜻을 운운하는 일은 하느님을 무정하고 잔인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악한 처사에 불과한 것이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함으로써 한편으로 피해자는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가해자는 자신이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게 하고, 회피하게 한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면서도 거기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많은 사람들은 깊은 절망의 심연에 빠져든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지금 나에게 닥친 고통의 원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고통의 의미와 이유를 모른다고 해도 신앙과 삶을 포기하고 무너질 필요는 없다.


하느님은 과거의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고, 비록 고통의 의미를 다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지독한 고통의 심연 속에서 그분은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느님의 고통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시는 분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자리는 바로 고통의 현장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라는 현실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인 것이다.


그렇다. 적어도 임마누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극심한 고통의 상태에서 하느님 당신은 도대체 무얼 하고 계시느냐고,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 너거 아부지 머하시노? »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임마누엘 하느님은 고통 당하는 바로 거기에 함께 계셨다고 알려준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을 때에도, 하갈이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버림받아 울고 있을 때에도,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다니엘과 세 친구가 불구덩이에 던져졌을 때에도,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 상에서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라고 목놓아 절규하던 순간에도 하느님은 바로 거기 고통 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셨다.


하느님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곁에 머물러 계신다는 것, 이는 하느님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고통을 극복하고 이겨내게 할 버팀목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 중에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그분께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다시 일어 날 수 있다면, 하느님은 기꺼이 그러한 원망과 비난을 들어 주신다. 그리고 그 원망과 비난을 다 받아 주시면서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당신의 아들이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 »(하느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원망의 말에서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내어 맡기 나이다 »라는 신뢰의 말로 넘어갈 수 있는 힘, 빠스카의 힘을 주셨듯이 말이다.


하느님은 고통의 원인을 해명해 주시는 분이 아니며, 고통을 원천적으로 제거하시는 분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증언하는 하느님은 고난을 딛고 이겨낼 힘을 주시는 분이시며,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의 현실에 동참하는 분이시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시기까지 하시면서, 그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분이시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두 가지 비유 이야기를 들었다.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다. 이 두 비유 이야기는 하느님의 행동방식에 대한 비유들이다. 하느님은 마치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같은 분,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시지, 누군가의 압력에 마지못해 일하는 분도, 또 누가 시킨다고 일하는 분도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저 하늘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창조하신 그 세상을 몸소 돌보시며, 그 세상이 완성되기 위해 스스로 땀 흘리시며 일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은 겨자씨와 같은 분이시다. 눈에 보일 듯 말듯 작은 겨자씨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런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서 싹을 틔우고, 가지가 자라나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되듯이, 하느님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하느님은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일하시면서 어떤 일이든 이루어 내신다.


겨자씨가 자라나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쉴 곳인 그늘을 마련해주듯이(마르 4, 32 참조), 하느님도 사람들에게 ‘쉴 그늘’, ‘머물 그늘’이 되어 주신다. 바로 세상에 구원이 되시는 것이다. 결국 겨자씨 비유는 우리를 위해 눈높이를 낮추신 하느님, 우리를 위해 겸손해지신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 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같은 분, 겨자씨와도 같은 분,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믿고 살아 가고 있다면, « 고통의 도가니 » 속과도 같은 이 나라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고통 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한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 곁에서 말없이 함께 머무는 것, 그의 떨리는 손을 잡고, 그의 슬픈 눈을 응시하는 것, 좌절하고 분노하고 절규하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지켜 봐주며, 함께 울고, 이 어처구니없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함께 분노하고 저항하며 함께 그들과 연대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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