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휴천재일기] 우리 외할머니가 사약을 받아들고서…
  • 전순란
  • 등록 2018-08-14 18:42:05

기사수정


2018년 8월 13일 월요일, 맑음


늙으면 피부로 느끼는 온도 감각이 둔해질까? 엄마는 문이란 문은 다 닫고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안 틀고 주무신다. 긴 바지, 긴 팔 웃옷에 춘추내복까지 입고서… 방안 온도가 31도! “엄마, 안 더워요?” “덥긴 뭐가 덥냐, 여름이 다 그렇지? 이 만큼도 안 더우면 곡식도 안 익어, 얘.” 에어컨 리모콘은 아예 치워버리고 선풍기 코드도 빼놓았다.



에어컨 온도를 (엄마 사정을 생각해) 27도로 했는데 좀 앉아계시다 빨리 끄라고 성화다. 그래도 낮엔 견뎌냈는데 밤엔 도저히 잘 수가 없어, 버티고 버티다 5층의 보스코 방으로 올라가서 (보스코가 함께 올 적마다 원장님이 책상이 놓인 손님방을 배정해 준다. 그 틈에도 집필할 여유를 드린다면서... 나는 당연히 엄마 곁에 자리를 펴고) 에어컨 밑에서 한 소금 얻어 잤다.


새벽녘 엄마 방으로 돌아오니까 그 어둑한 시각,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를 만큼 더운 방에서 울 엄마는 착한 아기처럼 쌔근쌔근 잘도 주무신다. “엄마, 건강하면 오래 살아도 되는데 아프면 빨리 죽어야 해. 알아?” “그래, 고맙구나, 눈물겹게.” 엄마는 눈을 흘기신다. 우리 모녀의 말을 듣고 있던 이모가 들려주시는 비화.


“너희 외할머니가 무릎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시다 며 ‘왜 이리 오래 사는지. 빨리 죽고 싶다’하시며 나더러 빨리 죽을 방법 좀 찾아달라고 매일 같이 조르시지 않았겠니? 그래 하루는 손주들이 놀러와 새알 초콜릿을 주기에 색깔 있는 건 다 골라먹고 밤색만 남겼더란다. 우중충한 그중에서 다섯 개를 골라 너희 외할머니한테 드리며 ‘엄마 죽고 싶댔죠? 이 약 먹으면 죽을 테니 자, 받으세요.’ 하지 않았겠니? 사약 초콜릿을 받아든 너희 외할머니… 깊은 한숨을 쉬고는 먼 곳을 회한이 넘치는 시선으로 한참 바라보시더구나.” “그래서요?”


“아마도 귀양 가서 위리안치(圍籬安置) 당하다 사약을 받아든 신하가 머리를 풀고 거적에 무릎을 꿇고서 임금님 계신 곳을 우러러 보던 얼굴표정이, 내 모르긴 몰라도, 딱 그랬을 게다.” “그래서요, 이모?” “그래서라니? 너희 외할머니, 제 정신이 드셨는지 갑자기 눈을 획 돌려 날 노려보시며 ‘이 못된 년!’ 하고 호통치시지 않겠니?”


“그러고서 그 알약을 가져다 냄새를 맡으시더니 ‘이거 쬬코라또구나!’ 하시며 얼굴이 환하게 펴지시더구나. 그렇게 사약을 드신 너희 외할머니, 106세까지 사셨으니…”



아침을 드시고 엄마가 아침잠에 빠져 있는 시간 우리는 지리산을 향해 떠났다. 그 지긋지긋한 도회지의 열기를 뒤로 하고 산 속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날 듯 한 기분이지만 바깥 온도 38도를 가리키는 아스팔트 고속도로에서 공사 중인 남정들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돌아왔다. 차선 하나를 막고 그 뙤약볕에서 펄펄 끓는 콜탈을 깔고 있는 인부들…


정말 어제 읽은 기사대로 ‘지구 온난화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었을까?’ 우리가 지난 달 찾아간 제주도 비자림의 삼나무를 거침없이 베어내는 인간들이라니! 심지어 ‘삼나무는 일제가 심었다!’ ‘목재가 안 된다!’ ‘그 밑은 산성이라 어떤 식물도 자라나지 못하는 해로운 식목이다!’ 등등을 지껄이며 벌목을 지지하는 환경론자들도 있다니…


미리내 저수지마저 바짝 말라간다



명박이의 4대강 삽질정치를 합리화해주던 교수들도 자칭 ‘환경론자들’이었다 저렇게 ‘녹조라떼’로 썩어가는 강물을 보고는 지금은 모두 어디로 숨었나? 브라질에 있는,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밀림을 사정없이 벌목하던 자들의 양심을 무마시켜 준 것도 자칭 환경학자들이었다. “아마존 천년 숲에서 떨어지는 낙엽이 아마존강 바닥에 쌓여 썩으면서 탄산가스를 만들어 지구의 오존층을 파괴 한다!”는 해괴한 논문을 써낸 작자들 말이다.


대진고속도로를 타면 덕유산과 지리산이 우릴 맞아준다



지리산 깊숙이 솔숲에 둘러싸인 휴천재는 해가 지자 제법 시원한 바람이 인다. 안주인 없는 새에도 텃밭의 남새들은 부지런히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늙은 오이, 노랑 호박, 기다란 가지를 한 소쿠리 땄다. 고맙지도 않은 잡초들은 더 실하게 컸고…


해거름이 되자 이 산골의 물까치떼가 모조리 날아든다, 우리 배밭으로! 나야 좋은 화초와 채소를 잡초와 구분하고, 고운 새소리와 못된 물까치떼를 가리지만 하느님 눈에는 다 사랑스럽겠고 그 점에서는 내가 도저히 못말리는 분이어서, 나도 까치떼를 그냥 두기로 했다. 내가 소릴 질러봤자 서른 마리 쯤의 새떼가 듣는 척도 안하지만…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