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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죽을 뻔 해서는 아무것도 못 배워요’
  • 전순란
  • 등록 2018-08-10 11:3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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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9일 목요일, 맑음


보스코가 공부하는 서재는 28도로 온대, 그 옆방 침실은 30도로 아열대, 그래도 서재 문을 열어 놓아 그 덕을 조금 보는 중인데 화장실로 들어서면 35도 열대! 몇 달만에 유심히 살펴본 화장실은 더럽고, 주변이 더러우면 더 덥다. 화장실의 모든 걸 복도에 꺼내 놓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청소를 하고 나니 힘은 들었어도 개운하다.


지구가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들에게 이렇게 징그러운 불판 여름을 보여주며 고생을 시키고 나면 지구가 얼마나 귀한지, 그 귀한 지구를 모시고 인류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조금은 생각하라고 집중 교육을 시키는 중인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더운 한철에는 약간 철이 드는 듯 하다가도 시원한 바람이 불면 금방 잊어버리고 추운 겨울이라도 오면 미세 먼지 타령하느라, 난방 걱정 하느라 이런 여름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각할 거다. 


‘죽을 뻔 해서는 아무것도 못 배워요. 정작 죽어야 사람은 뭔가 배우더라구요.’ 영화 닥터하우스에서 나온 대사였다. 노아의 대홍수 때에도 ‘사십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내려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고도 물이 열다섯 암마나 더 불어난 다음에야’ 인류는 하늘의 경고를 알아들었다니까…



오늘 서울에도 비가 온다 해서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4시쯤 후두둑 한 10초 소나기가 내리더니 ‘끝!’ 지리산에도 매일 비 온다는 소식이 들리던 참이어서 행여나 하고 전화를 했더니 사정은 여기와 같단다. 오기 전날 텃밭 채소에 물을 줄까 하다 내일까지 버티면 하느님이 배터지게 먹여 주실 거라고 달래놓고 왔는데… 엄마도 없는데 얘들이 목말라 어쩌나 마음은 벌써 휴천재 텃밭에 가 있다. 거기만 아니라 어디서 단비 내리는 소식이라도 들리는 곳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저 그분 손길만 쳐다본다.


빵기가 장모님께 갖다 드린다고 헌 전기주전자를 멀리 제네바에서 들고 왔다. 주전자 바닥에 낀 석회를 식초로 닦고 선을 손질한다. 그래도 체면을 중시하는 구세대 보스코가 누누이 잔소릴 한다. ‘사위가 새것도 아닌 헌 것을 장모님께 갖다 드리다니’, ‘아마 딸 지선이가 보낸 거 아니냐?’ 듣다 못한 내가 딱해서 “여보, 쟤는 내 아들이라 체면, 그런 것 안 키워요.” 


아무튼 엄마에게 폐품 수집을 승계 받더니 우리 아들 처가에까지 확산시키는 중이다. 손주들에게도 유전인자가 머지않아 발현할 게다. 아마 빵기가 일 년 내내 찾아다니는 난민촌(지구상에 6천 만의 난민이 떠돌고 그 중 2천 5백만이 유엔의 보살핌을 받는단다)에서는 깡통 하나, 빈병 하나도 소중한 살림이겠지. 



아래층 총각은 잠보. 아마 더위에 밤새 잠을 설치다 새벽녘에 선선해지면 잠들다 보니 깜빡하면 알바에 지각이라 적당히 아침을 먹고 달려 나가나 보다. 오늘 저녁을 함께 먹으며 웬만하면 설거지 그릇은 씻고 나가라니까 보스코와 빵기까지도 나한테 눈총을 보낸다. 하기야 빵기나 빵고처럼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은 아이가 아니면 기본적으로 주변정리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구총각은 일층 마루도 부엌도 화장실도 깔끔하게 청소하고 살고 있다.


우리 4대 집사(하나는 체류 기간이 너무 짧아서 뺀다) 중에 제일 범생은 손총각이었다. 토요일이면 와이셔츠 다섯 개를 다 빨아 싹 대려서 월요일부터 하루 한 개씩 입었다. 바지도 다려서 선을 세웠다. 일주에 한번 아래층 대청소, 정원 꽃들에 물을 주고, 눈이 오면 우리 골목은 물론 마을길까지 쓰는 총각이었다. 장가가서 얼마나 잘 할까 새댁에게 물었더니 ‘잘해 주긴 하는데 엄청 잔소리가 많다.’라는 평. 나라면 잔소리가 많아도 정갈한 사람이 좋을 텐데… 이건 취향 문제인가? 보스코처럼 무심한 남자에게 실컷 잔소리하며 사는 편이 더 나을까?



빵기가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아래층 총각과 우리 세 식구가 저녁식사를 하러갔다. 빵기가 짜장면을 먹겠다고 해서 중국집엘 갔다. 어렸을 때 우리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짜장면! 아마 모든 게 맵고 짜고 거친 음식인데 어린이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유일하고 이국적인 맛의 호사! 일 년에 한번 생일이나 아니면 졸업식 날 얻어먹던 짜장면. 곱빼기면 더 좋았고… 허기졌던 시절이 그리울 때면 짜장면을 먹자. 


우리 문정공소 헤드빅 수녀님이 고속도로 휴게소를 들를 때면 늘 돈까스를 잡수시던 일과 같은 이치다. 서양사람이 한국 휴게소에서 먹을 만한 유일한 ‘양식’요리가 돈까스일 테니까…


시아와 시우가 아빠더러 사오라는 과자 리스트를 적어 보냈다. 시아는 딱 두 줄인데 시우는 다섯줄. 초저녁에 빵기랑 이마트를 다녀왔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스넥들. 인터넷에서 그림만 보고도 침을 흘리겠지. 고향에서 날라 온, 고국에서 아빠 손에 들려오는 친근한 맛 자체가 고향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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