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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이 시대 누가 예수의 등을 지녔을까?
  • 김유철
  • 등록 2018-08-07 10:43:36
  • 수정 2018-08-09 18: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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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83호) 뒷면 ⓒ 김유철


형언할 수 없는 보살의 표정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두 개 있다. 모양새는 거의 흡사한데 하나는 국보 78호이고 다른 하나는 83호이다. 익히 알다시피 중앙박물관에 전시되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모두 금동으로 되어있고, 일본의 국보 1호인 반가사유상은 목조로 되어 있다. 예술적 가치나 고고학적인 가치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에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반가사유상은 부처로서 해탈하기 전 생로병사의 무상함을 느끼고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에서 유래된 형태이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발 위에 올려놓고, 오른팔을 무릎 위에 고이고 손가락을 뺨에 대고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긴 모습은 누구에게나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다. 


고뇌의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사유상 뒤쪽의 등을 본 적이 있는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을 다녀온 사람들은 모나리자 작품을 만났을 때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하지만 오래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반가사유상의 등이 품은 묵언은 그 어떤 웅변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노자는 大辯若訥(대변약눌)이라 말했다. 그 뜻은 ‘최고의 언변은 마치 말을 더듬는 듯하다’라며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말을 줄인다는 의미와 동시에 자신이 품은 뜻을 자기 그릇에 담지 않는 것이라 새겼다.


기형도 시인은 침묵을 <소리의 뼈>라고 표현했다. 분명 침묵이 훨씬 많은 말을 한다. 반가사유상의 등을 본 그 자리에서 꼼작하지 못한 채 그날의 관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보살의 얼굴에서 보는 형언할 수 없는 엷은 표정과 달리 약간 구부정한 반가사유상의 등은 분명 고뇌의 등이다.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등이며 어머니의 등이다. 무엇이 엷은 미소 뒤에 그런 등을 지니게 했을까?


목소리 낼 수 없는 사람들


그 날 이후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의 등을 바라보는 습성이 생겼다. 간음한 이가 잡혀 왔을 때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요한8, 1-11)를 쓰던 그분의 등,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당하던 그분의 등(요한19, 1). 그리고 끝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산을 올라 십자가에 눕혀 못질을 당하고 다시 군사들이 그것을 우뚝 세웠을 때 예수의 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의 아픔보다 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그 등에 담겨 있는 듯하다. 



이 시대는 누가 예수의 등을 지녔을까? 명함 지닌 사람들이나 이미 특별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 어쩌면 종교라는 미명으로 ‘선함’의 대명사가 된 사람들보다 목소리 낼 수 없는 사람들, 목소리를 내어도 들리지 않는 사람들, 펴지도 구부리지도 못한 채 그저 삶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등에 물기어린 침묵이 존재하고 있다. 사색과 기도도 스마트폰으로 하는 시대이지만 우리에겐 분명 뜨거운 십자가를 짊어진 등이 도처에 있다.





가슴은 말로 표현 할 수 있지만 등은 말하지 않는다 

아비의 등 

어미의 등


먼 바람의 등

저 물결의 등

저녁 산의 등


아, 그대의 등


등은 미소 짓지 않는다 

등은 펴지도 구부리지도 않은 채

등은 무상함을 안다


(졸시 <등>. 『천개의 바람』.2015. 피플파워)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삶·예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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