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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나무 벤 자리에 나무를 심는 사람들
  • 김유철
  • 등록 2018-07-10 10:57:45
  • 수정 2018-07-17 10: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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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모퉁이 글 <바람소리>를 시작합니다. 시인의 부족한 글을 2016년 1월부터 가톨릭프레스에 연재했습니다. <붓과 시편>으로 2년간 연재했고, 2018년에는 <노자와 교회>로 만났습니다. 하반기를 맞아 7월부터는 새로운 마음으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바람소리>라는 꼭지명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겠습니다. 그 바람 안에 성령이 담기기를 기도합니다. 김유철 두손모음


▲ 2014년 6월 11일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사진출처=오마이뉴스)


밀양송전탑에서


2014년 6월 11일 그 날을 기억한다. 울산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3호기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송하기위한 송전탑과 관련하여 경남 밀양시는 한마디로 용광로였으며 아수라장이었다. 6월 11일 송전선로 건설을 반대하는 농성장을 철거하기 위한 행정대집행이 벌어졌다. 경찰 20개 중대 2000여 명 및 한전 직원과 용역 250명이 투입되었고 이를 막기 위한 마을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 및 천주교 수녀들 중 20여 명이 실신 및 부상했다.


행정대집행이 지나간 송전탑이 들어설 숲들 위로 전기톱이 굉음을 내고 지나가자 아름드리 나무는 신음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나무 곁에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던 어르신들은 곡소리를 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내내 곡을 하던 어르신들은 나무 벤 자리에 다시 어린나무를 심었다. 경찰과 용역들도 그 어린 나무는 차마 뽑아내지 못했다. 경남 밀양의 부북면, 상동면, 단장면, 산외면에 목숨을 걸고 산과 땅을 지키려던 할매, 할배들은 그렇게 세월을 견뎠다.


평창올림픽과 가리왕산


2018년 2월은 일년 중 가장 짧은 달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긴 달이었다. 평창올림픽은 운동경기를 넘어선 평화올림픽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창올림픽을 위해 강원도 정선군의 가리왕산은 자신의 온 몸을 내어주었다. 하긴 가리왕산이 자신의 몸을 자진해서 내어준 것이 아니라 ‘국가’가 올림픽을 위하여 일방적 ‘징발’을 한 것이다. 그곳은 올림픽기간 동안 알파인 스키장으로 쓰였고 현재는 토사와 돌무더기가 뒹구는 폐허다. 국가적 쓰임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징발이 지나간 자리는 사실 몸서리쳐지는 광경이고 사람의 마음으로 차마 쳐다볼 수 없는 미안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평창올림픽을 하기에 앞서 강원도는 가리왕산 복원을 약속했었지만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자 환경부가 환경영향평가법 제40조 3항 위반으로 지난 6월말 강원도에 1000만원의 과태료 처분을 통보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상황 및 앞으로 가져올 자연재해-자연보복-에 대하여 정말 ‘공무원’적인 책상물림의 생각과 조치이며 환경부의 면피성처벌임과 동시에 강원도는 물론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대처이다.


▲ 정선 가리왕산 알파인 스키장 자리 (사진출처=한겨레)


대사제 카야파는 언제나 부활한다.


핵발전소에서 출발하는 ‘765KV 송전탑’ 문제가 밀양에서 제기된 2008년보다 1년 앞서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란 영화가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어떤 경고거나 예언이었을까? 마치 밀양密陽이란 이름 그대로 ‘비밀스런 햇살’이 비추는 곳이라는 말처럼 2014년 밀양 송전탑 부지에 대한 행정대집행은 곰비임비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밀양은 핵발전소에서 대도시로 보내는 전기수급을 볼모로 한 농민들에 대한 일방적 항복 요구였지만 가리왕산의 폐허는 자연을 쓰고 버리는 일회용 컵이거나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재활용 가능한 도깨비 방망이로 보는 무지와 다름없다. 또한 그것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힘 있는 일부 인간 동물의 일방적 폭력이다.


어쩌면 그 일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위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논리 즉,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라고 했던 대사제 카야파의 모습과 일치한다. 늘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논리는 유사이래 기득권층이 강요하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분명 그들만의 지독한 대물림된 의식화였다.


그대는 누구에게 의식화 되었는가?


‘의식화’를 사전에서는 이렇게 푼다. “사회의 현상, 가치관 등 어떤 대상을 체계적으로 의식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며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깨치게 됨.” 밀양에서 송전탑과 관련하여 주민과 공권력이 첨예하게 대립되자 한편에서는 “천주교와 반핵단체에게 세뇌되고 의식화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8년 동안 밀양에서 어르신들과 함께했던 김준한 신부(부산교구)는 “환경이나 생태를 몰랐던 나는 밀양 어르신들을 만나고 의식화 되었다”고 말했다. 


그대는 누구에게 의식화 되었는가? 우리는 모두 예수를 만나 빼도 박도 못하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의식화된 사람들이다. 경전 <한비자>에 ‘교사불여졸성 巧詐不如拙誠’이란 가르침이 있다. 즉, 세상이 아무리 화려한 언설과 치장으로 꾸민다고 하더라도 어리석고 졸렬하지만 성실하고 진정성 있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으로 새긴다. 나무 벤 자리로 돌아가 다시 나무를 심자.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이 산을 옮긴다.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삶·예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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