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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절대복종하겠다"는 언약의 실효성
  • 전순란
  • 등록 2015-06-11 12:25:57
  • 수정 2015-06-11 12: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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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0일 수요일, 맑음



“내일은 또 비가 뿌린다는데... 미선이가 사 보낸 방부페인트가 어젯밤에 도착했는데.... 여름 장마에 테라스를 보호하려면 오늘밖에 칠할 시간이 없는데....” 창가에 서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다못해 보스코가 “오늘 테라스 페인트칠 할까?” “조오쵸!” “내가 서쪽에서 칠하고 당신은 동쪽에서 칠해 와.” “그럼 내가 설거지 하는 새에 당신은 테라스에 빗자루질을 하고...” 이렇게 데크의 연례페인트칠 공사가 시작됐다.


오전 9시 이전이라 처음엔 햇살이 겁나지 않았다. 오전에 한번 발라놓고 해질녘에 다시 한 번 발라야지 하면서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매해 나 혼자 해 오던 패인팅을 올해는 그가 돕는 품이 내 발이 시원치 않다고 나름 동정했나보다.


어느 새 땀이 등으로 이마로 줄줄 흐른다. 보스코가 칠하는 품은 나무결에 칠을 바른다기보다 데크에 페인트를 퍼붓는 행센데 “잘 펴서 발라요. 얇게얇게 발라요.”라고 잔소리할라치면 “그럼 당신이 알아서 해!”라며 얼른 서재로 들어가 버릴 게 뻔해서 참았다. 나이 들어 니약나약 하면서 손일을 하는 것도 큰 행복이니까.




내 몫을 서둘러 마치고 나는 함양으로 가서 발 치료를 받았다. 올 때마다 내 발을 눌러보는 명인당 선생님은 차도가 별로 없어 답답해하고, 나 역시 한방치료만 받는 게 잘하는 일인지 확신이 안 서지만 일단 선생님에게 맡긴 이상 그냥 두고 본다. 그것도 요번 금요일까지니까...


아랫집 도미니카씨가 하는 말, 자기가 관찰해 보니 내가 매해 한 가지씩 병치레를 하고 있단다. 작년엔 눈(백내장 수술과 후유증), 금년엔 발, 전전해는 대장, 그 전 해는 대상포진과 급성맹장. 맹장의 경우, 혼자서 차 몰고 가서 혼자 입원하고 혼자 수술받고 그 다음에 보호자 남편이 나타나고 했는데....


내 딴엔 누구보다 건강하다고 자부하고 주변에서는 ‘철의 여인’으로 부러워하는데, 정작 나는 해마다 몸에 한 가지씩 이상이 생겨 입원하고 수술을 받아야 하는 건 스스로 일을 조정 못하는 나의 완벽주의에다 시도 때도 없이 손님을 불러오는 보스코의 염치가 맞떨어지는 까닭이리라. 하긴 60대 중반 나이에 안 망가진 몸이 어디 있으랴? “너 좀 힘들구나, 쯧쯧! 내가 좀 살살 써먹을 게.”라고 달래가면서 부리는 수 밖에...


오후에 테라스를 한 번 더 칠하려는 참에 보스코는 내가 읍에서 사온 ‘반짝이’를 배나무에 마저 달겠다면서 혼자서 하란다. 어제 내동댁이 우리 집 뒤 밭에다 참깨를 심고 있었고 물까치들이 전깃줄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과연 오늘 아침에 보니까 물까치가 부리로 흙을 뒤져가면서 고 작은 깨알을 잘도 찾아서 쪼아 먹는다.


요즘 콩을 심을 때는 일부러 빨강 색으로 물을 들여 심는다는데 새가 붉은색을 기피하나보다. 심지어 5월에 심어야 할 콩을 3월로 당겨 심어 두 잎 새싹을 올릴 무렵에 새들이 뿌리채 뽑아먹는 만행을 피하기도 한다. 여하튼 농사는 새들과의 눈치싸움이기도 해서 보스코가 어제 오늘 배 밭에 쉰 장 가까운 반짝이를 매다는 것도 새들과의 기싸움이다.


오후 4시경 전주에 갔다 돌아오던 길에 정한길 선생 부부가 휴천재에 들렀다, 우리가 여행 간다는 소식에 쌈장, 초장, 간장을 잔뜩 챙겨들고서. 어머니 초상에 문상 온 답례차 들른 길이었다. 


이번에 큰일을 당하고 보니 아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내조를 해 줬는지 새삼 느꼈노라고, 그래서 앞으론 매사에 아내에게 절대순종하겠다고 언약했노라 자랑한다, 경상도 남자가! 그런 언약이 얼마나 실효성 없는지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로 여자가 절망적으로 실감하는 바이지만 우선은 듣기 좋을 게다.


식당을 차려야 할 만큼 많은 손님을 가야산 발치의 농장으로 늘상 끌어들이고, ‘우리밀살리기’ 운동에 올인하다 큰 손실을 보았고, 가톨릭농민회 실무를 맡아 서울로 안동으로 나돌아 다니는 동안 “우리밀식품”을 부인이 혼자서 운영해 왔으며, 그런 중에도 둘째 며느리면서도 시어머니를 수십 년 모셔왔으니 남편으로서는 아내에게 정말 큰 절을 해야 할 게다.


그렇게 남편에게서 집안의 전권을 위임받을지도 모를 부인 역시 9천 평 넘는 농장에 30여 가지의 산나물과 약초를 심어서 도회지 어린이들에게 산나물의 진면모를 가르치겠다는 야심찬 뜻을 내게 펼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족히 10년은 그 집도 편한 세월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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