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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노자와 교회 : 시대는 언론에게 길을 묻는다
  • 김유철
  • 등록 2018-05-22 16:35:37
  • 수정 2018-05-25 18:2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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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道廢 대도폐 有仁義 유인의 知慧出 지혜출 有大僞 유대위 肉親不和 육친불화 有孝慈 유효자 國家昏亂 국가혼란 有忠臣 유충신


큰 도가 무너져 인과 의가 생겨나고, 지혜가 존중받아 큰 거짓이 생겨나고,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여 효와 자애로움이 생겨나고, 나라가 어지러워 충성스런 신하가 생겨난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2003. 삼인)




평행이론의 반대는 무엇일까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바 있는 ‘평행이론’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사람의 운명이 같은 식으로 반복된다는 이론으로 소개되어진다. 그렇다면 그와는 정반대의 경우는 무슨 이론일까? 일테면 서로 같은 시공간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운명과 각각의 길에 있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이론화가 안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1988년 5월 15일. 시대가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열기를 디딤돌로 삼아 두 신문이 같은 날 창간되었다. 이른바 생일이 같은 운명이다. 그것이 한겨레신문과 평화신문이다. 이후 두 신문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의 이름을 한겨레와 가톨릭평화신문으로 개명했다. 한겨레는 창간사에서 ‘국민을 대변하는 참된 신문’, 평화신문은 ‘참 평화 지향 위한 참 언론’을 표방했다. 2018년 창간30년 사설에서 한겨레는 ‘진실과 평화를 향한 한겨레의 다짐’을 말했고, 평화신문은 ‘참 평화 참 언론의 소명 되새기며’를 실었다. 그렇게 되고, 그렇게 하길 바란다.


▲ 한겨레 창간호.


한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1.1) 요한복음 처음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처음’과 ‘말씀’과 ‘하느님’이라는 인간의 머리로는 담아낼 수 없는 단어들이 거의 한 문장에 들어있지만 현대인에게 이질감 없이 다가오는 단어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홍수처럼 밀려오는 정보를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거름막이 되어주는 언론은 현대인에게는 결정적이다. 언론의 역할은 분명 ‘말씀’이다.


노자는 일찍이 “큰 도가 무너져 인과 의가 생겨나고, 지혜가 존중받아 큰 거짓이 생겨나고,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여 효와 자애로움이 생겨나고, 나라가 어지러워 충성스런 신하가 생겨난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인과 의, 지혜와 효 그리고 자애로움과 충성스러움마저도 그 자체가 쓸모있음이 아니라 큰 도가 무너진 연후에 발생한 부산물일 뿐이라는 경고등을 켠 것이다. 그 경고등은 당연히 말씀의 기능을 지닌 언론의 몫이다. ‘큰 도’로서 ‘한처음에 계셨던 말씀’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어야한다.


신영복과 평화신문


격월간지 <공동선>에서 신영복 선생과 평화신문에 얽힌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평화신문을 창간하던 지난 4~5월 무렵에는, 어쩌면 신선생의 붓글씨 가운데서 ‘평’ ‘화’ ‘신’ ‘문’ 넉 자를 찾아 집자集字하여 제호題號로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었다. 그래서 다행히 ‘평화신문’ 넉 자를 집자할 수 있었고, 보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좋다고는 하였지만 막판에 가서는 ‘제자題字’를 쓴 사람을 밝혀야 할 텐데 어떻게 할 거냐는 문제에 부딪쳤다. 신 선생이 이렇게 나오신 뒤에 우리 신문이 창간되었더라면 아마도 신 선생의 글씨로 ‘평화신문’의 제자를 삼았을 것이다.”(2016년 3+4월호. 김정남. 그 사람)


▲ 평화신문의 창간호


김정남 선생은 당시 평화신문의 편집책임을 맡고 있었다. 평화신문은 신영복 선생이 옥중에서 쓴 편지를 신문에 실어 화제를 낳았다. 김정남의 표현대로라면 “편지가 실린 신문이 세상에 나가자마자 독자들의 호응이 너무도 뜨겁고 커서 횟수를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모인 편지글이 이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귀한 책으로 탄생한다. “신영복의 편지글에는 읽는 사람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울림이 있다. 글이 굳이 누구를 깨우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조용히 읽은 사람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 누구에게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도 아니며, 내 말이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지만, 참으로 그 글들은 이심전심으로 알아듣게 하는 힘이 있다.” 


언론의 길. 

도道는 반성에서 시작한다.


2009년 10월 언론 역사상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되었다. 진보매체인 한겨레와 보수매체인 조선일보가 동시에 같은 내용을 사설과 기사로 실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청와대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른바 ‘껄끄러운 질문’을 한 기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언론은 스스로 치욕으로 여겼다. 그것을 한겨레는 ‘침묵의 카르텔’(10월 2일)이라 불렀고, 조선일보는 ‘부끄러운 언론’(10월 1일)이라고 자책했다.


길 위에 서 있는 언론, 특별히 교계언론을 다시 생각한다. 교계언론들의 자기성찰은 시작한 것인가 혹은 마친 것인가, 진행 중인가? 내부의 성찰과 함께 외부의 회초리에 대하여 포용할 품은 있는 것인가? 교계언론에 ‘침묵의 카르텔’은 없는가? ‘부끄러운 언론’의 모습에 대한 자기고백의 용기는 불가능한 것인가? 


그 사람 목소리가 그립다.


▲ 지난해 1월 15일 성공회대에서 열린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에게 편지를 남겼다. ⓒ 문미정


30년전 창간 무렵 평화신문에 신영복 선생의 감옥글이 실렸다는 것이 기쁘고 동시에 서럽다. 우린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다짐하며 김정남의 회고를 조금 더 인용한다. “신영복의 글은 뜨겁고, 힘들고, 아픈 이야기를 낮고 조용하고 부드럽게 하는데 있다. 그러면서도 뜨거움을 느끼게 하고, 정의로움을 일깨우며 따뜻함을 온 몸으로 받아드리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삶과 길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 앞에 조용히 펼쳐 보인다.” 그런 말씀이 행간에 실려 독자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삶·예술연구소'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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