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젯밥에만 관심 가지는 종교, 무릎꿇고 반성해야
  • 지성용
  • 등록 2018-05-10 18:58:04
  • 수정 2018-05-14 12: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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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간음하던 여인이 회당 앞에 끌려온 이야기가 있다. (요한 8,4-5)


흥분한 사람들이 예수에게 묻는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사람들은 예수에게 간음녀에 대한 판결을 묻는다.


생각해 보자. 현장에는 틀림없이 남자와 여자가 뒤엉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여자만 끌고 회당 앞으로 온 것일까? 간음하던 사람을 붙잡아 오려면 두 사람을 다 데려와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성만을 회당 앞으로 끌고 와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곧 율법의 집행자, 권력을 틀어쥔 남자들이었을 것이고 소위 거룩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민주, 정의, 평화의 이름으로 새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성추문이 언론을 통해 하나 둘 드러나며 많은 이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던지고 있다. 검찰에서 시작한 미투운동이 문화계, 종교계, 문학계, 대학가, 모든 곳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마치 봄을 기다린 생명들이 새싹을 터뜨리듯 사방에서 ‘나도 당했다’, ‘나도 고발한다’고 말 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말하지 못했다.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혹시 이것을 말하면 나에게 닥쳐올 여러 가지 불이익과 사람들의 비난이나 배척 그리고 고립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2차 피해를 말하고 있다. 가해자들이 소속된 조직과 그 조직을 떠받치는 사람들은 피해자들을 ‘정신이상자’로 몰아가거나 ‘합의된 관계’이며 ‘서로 좋아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말로 다시 문제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다. 순식간에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와 ‘상황’만이 남아 발 없는 말로 퍼져나가며 피해자를 다시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미투’운동을 통해,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교회 내부 인식 수준을 보았다. 


일부 신자와 사제들은 교회 보호 논리를 앞세워 ‘왜 문제를 밖으로 알렸느냐? 다른 속셈이 있는 것 아니냐, 너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라며 오히려 피해자를 나무란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뉴스에 보도된 몇 몇 ‘알려진 사건’외에 그동안 우리가 ‘덮어’ 두었거나 조용히 ‘처리’하면서 쉬쉬 해왔던 일들과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진행형인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이다. 미투 운동의 힘으로도 꺼내 보이지 못하는 성범죄와 성폭력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피했고 아슬아슬 수위를 조절하며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가톨릭교회 내부의 성 스캔들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14년 5월 교황청은 “2004년 이후 (10년간) 3400여 건의 성폭행 및 성추행 사건이 보고됐다”면서 “성직 박탈 828명 외에도 2572명이 평생을 속죄와 기도로 지내거나 각종 제재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지난 15년간 성직자들의 성추문으로 인해 발생한 벌금과 소송비용 등이 약 33억 달러(3조 7천억 원)다. 벌금형을 선고 받은 성직자가 속해 있던 교구는 벌금을 납부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해야 했고, 이 결과로 샌디아고, 밀워키, 투산 등 8개 교구와 아일랜드 그리스도교 형제단의 미국지부와 예수회 산하 몇몇 지부는 파산신청까지 했다.


한국천주교회는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주교회의 의장이 언론을 통해 빠르게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해당 교구장들도 교구 신자들과 국민들에게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 이어졌던 춘계주교회의에서는 문제에 대한 심각한 토론과 대응책 마련에 분주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빠진 것이 하나 있다. 정작 행위 당사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문의 당사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 공세를 받거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해명이나 책임을 지려는 최소한의 행동마저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과 해당교구장이 대행했다.


▲ 지난 2월 28일, < KBS1 >의 보도로 천주교 수원교구 사제 성폭력 사실이 드러나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대신해 대국민사과를 했다. ⓒ 곽찬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해명을 본인 스스로 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법적이고 사회적인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왜 교회는 이러한 성인 사제의 사회적 책임을 대신해서 사죄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대구교구에서 벌어진 희망원 사태에 대해서, 인천교구의 성모병원 문제에 대해서, 청주교구 충주성심맹아원에서 일어난 11살 주희의 죽음에 대해서는 주교회의가 왜 한 마디 진심어린 사과나 반성이 없었을까? 


어디 그뿐인가, 성지에서 몇 십 년째 이어지는 금전과 토지분쟁, 교회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의문사 사건들에는 시종일관 침묵하면서 유독 사제성추문에 대해서는 왜 이리 발 빠르게 사죄하고 반성의 기자회견을 자청했던 것일까?


세월호 참사로 무고한 어린 생명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을 때도 생명과 평화, 정의를 말하던 교회는 침묵했다. 그 이후에서 ‘세월호 문제로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되며, 유족들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정부의 입장을 앞장서 외쳤던 곳이 바로 한국천주교회였다. 팽목항 성당과 지킴이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철수시키고 인사발령 했던 천주교회가 이제와 세월호 죽음을 기억하는 미사를 봉헌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열심히 외치던 ‘사랑의 씨튼수도회’ 수녀들이 운영하던 충주성심맹아원에서 11살의 주희가 온몸에 상처를 남기고 죽었는데 사건의 진상규명도 하지 않고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고 문제를 은폐하려 했다. 더군다나 1심에서 죄가 인정된 담당교사가 2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더니 대법에서 무죄를 확정 받았다. 그 담당교사가 무죄라면 범인은 다른 제3자 라는 것이다. 아이혼자 죽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미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충분히 검증해 보여주었다. 스스로 죽었다 하더라도 온 몸에 남은 상처와 멍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17년 8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 진실방의 감춰진 진실) 


법원에서 무죄가 났다고 진실이 사라지는가? 하느님의 목소리 ’양심‘의 법정에서 그들은 모두 유죄다. 공범자들이다.


▲ 지난 2일, 충주성심매아원 김주희 양 의문사 사건 대책위원회가 사랑의씨튼수녀회 광주본원 앞에서 `사랑의씨튼수녀회의 회개와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 문미정


거슬러 올라가 천주교 첫 번째 주교였던 노기남 신부는 1942년 1월 천주교경성교구장(주교)에 임명되어 그 해 5월 경성교구연맹 총회를 열고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위해 진충보국에 적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는 요지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신자 청년층에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지원병에 나가도록 노력할 것, 황군필승의 기원을 한층 철저히 힘써 할 것” 등을 결의했던 사건에 대해 일체의 사과나 진정성 있는 반성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 2015년 8월 16일 그것도 광복절 다음날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는 친일의 대명사 노기남 신부의 이름을 따서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센터’를 건립했다.


타인을 강제하는 힘을 ‘권력’이라 한다. 권력은 다른 사람을 그 사람의 뜻에 반하더라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힘이다. 


정치권력은 국가와 같은 정치 공동체를 지배하기 위한 권력이다. 정치권력은 다른 사회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는 권력에 비해 행사할 수 있는 범위가 크고, 법에 근거하여 강제적으로 행사할 수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바뀌어도 계속될 수 있다는 지속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국민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한다는 정당성도 가지고 있다. 국가의 정치권력은 국회, 정부, 법원이 나누어서 맡고 있다. 국가의 중요한 일을 하는 권한이 어느 한 기관에만 집중된다면 그 기관이 잘못된 결정을 하거나 권한을 마음대로 사용할 때 국가가 위태로울 수 있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도 침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룩한 어머니 가톨릭교회는 종교 안에서 발생한 권력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사용한다. 교회의 사회적인 역할은 사회복지나 병원, 대학이나 수익사업이 아니다. 요즘은 성당이든 교회든 절이든 어디를 가나 복지법인 없는 곳이 없고, 대학이나 병원 없는 종교단체가 없다. 종교는 공공재이지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이나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 아니다. 그런데 종교는 본연의 임무는 소홀히 하고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형국이다.


가톨릭교회의 지역 수장인 주교는 지역 종교 권력의 정점에 있다. 모든 인사권과 예산, 행정을 독점하고 조정하거나 명령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 공공의 국가권력도 삼권을 분립해서 비대해지는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생기지 말아야 할 종교권력은 교구장 주교를 중심으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진다. 대통령도 임기가 5년이면 다시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만 자격이나 실력이 의심되는 인성과 지성을 가진 주교가 75세 종신까지 주교직을 누린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다시 성경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들이 말하는 ‘모세의 계명’은 ‘십계명’ 가운데 “간음하지 말라”는 6계명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디에도 ‘여자/남자는 간음하지 말라’는 성별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명령도 없었다. 그렇다면 가해자인 남자도 잡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모세의 율법 십계명 어디에도 ‘간음한 이를 돌려 쳐 죽이라!’는 명령은 없다. 


모세가 받은 것은 열 개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10개를 자신들의 권력으로 613개의 조문으로 확장했다. 돌로 쳐 죽이라는 조문까지. 새로운 약속의 시대를 열었던 예수는 모든 율법을 정돈하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이라고 가르치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거짓 없는 ‘사랑’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행하는 2차 가해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어 진실한 사랑을 가로막는다. 


‘많이 힘들었겠다’ 공감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제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가 함께 해줄게’라고 말해주었다면 문제는 이렇게 심각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나의 형제 동료라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책임을 지고 사죄하며 용서를 청할 수 있도록 지켜봐주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는 어설픈 방어막은 오히려 한 인간의 오롯한 사람됨을 막는 죄악이 될 수 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행하는 2차 가해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어 진실한 사랑을 가로막는다. 두려움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길 가에 피어나는 개나리와 벚꽃을 보며 ‘아 봄이구나!’ 했다. 순각 내가 입고 있는 겨울외투가 무거워졌다. 인간의 마음이란! 글을 쓰고 있는 4월은 가슴 아픈 날들의 연속이다. 4·3 제주 민중항쟁 70주년, 4·16 세월호 참사 4주기, 4·19 미완의 혁명 58주년.


이 글이 세상의 빛을 보는 날 부터는 오월의 노래가 들려올 것이다. 5·18광주민중항쟁. 이러다가 우리나라 달력 365일이 모두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날들로 뒤덮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요사이 많이 달래진다. 북과 남에도 봄은 이미 왔다. 4월은 겨우 내 죽음이 찬란한 봄꽃들로 부활하고 5월은 빛고을이 푸른 부활로 기억되는 대한민국이 되면 좋겠다. 6월은 종전(終戰)과 화해 일치로 기억되는 날들이길 기도한다. 그래서 일 년 365일이 생명을 축복하는 날들로 가득 채워지는 그런 달력을 만들어 보자!


덧붙이는 글

다음은 <공동선> 5,6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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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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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8-05-24 11:20:56

    세상을 정의롭게 해야할 교회가 세상의 좁디좁은 법에 기대 교회의 잘못을 가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당금의 현실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를 교회라고 해야하는지 과연 예수님은 우리의 교회를 교회라 불러주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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