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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은 자기 자신의 핵심으로 향하는 것
  • 지성용
  • 등록 2018-04-23 12:01:21
  • 수정 2018-04-24 14: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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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7년 4월 발간된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 (사진출처=영화 ‘울지마 톤즈’ 스틸컷)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나 1987년 인제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후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살레시오회에 입회했다. 이후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2001년 사제서품을 받고 2008년 11월까지 남부 수단의 톤즈 마을에서 활동해 왔다. 이 신부는 톤즈 마을에 병실 12개짜리 병원을 짓고 한센병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 주민들을 보살폈으며, 학교와 기숙사를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이 자립하도록 도왔다. 


이태석 신부는 로마의 살레시오 신학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케냐의 나이로비로 답사여행을 떠났다가, 30여 년간 남 수단에서 활동해온 제임스 신부를 만나, 나이로비에서 2,800km 떨어진 남수단에 갔을 때 주민들을 보고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 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사람이 저렇게도 가난할 수 있구나, 저렇게 죽음 가까이서도 살 수 있구나” 하고 느끼면서 아프리카 수단에 가서 선교사로 생활하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수단은 내전이 극심했는데, 북수단은 남부에 대한 인종청소를 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3,300만 주민 가운데 200만여 명이 죽었으며, 300만여 명이 고향에서 쫓겨나고 20만여 명이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이 신부는 2001년 서울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곧 톤즈로 날아가, 진료소 일부터 시작했다. 톤즈에는 하루 200여 명의 환자가 찾아오는 진료소가 있고, 나병환자 병동이 따로 있다. 전쟁고아와 기숙학생 등 150여 명이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 80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가 있다. 그 밖에도 1주일에 한 번씩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도 했다. 그러던 이태석 신부는 2009년에 대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이어왔는데, “나는 평화로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선하다: everything is good” 라고 말하며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태석 신부는 살레시오 공동체 안에서 ‘홀로 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되어 수도공동체에 입회한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행을 두고 가까운 지인들은 필연적인 일이었다고 말한다.


▲ (사진출처=가족사랑연구소)


선우경식 원장은 1987년 서울 신림동에 요셉의원 문을 연 이래로 30여년 동안 의료진 20여 명과 일반봉사자 600여 명의 도움을 받아 노숙자, 행려자, 알코올 의존증 환자, 그리고 건강보험증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들 40여만 명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에게 의술을 베풀어왔다. 이처럼 요셉의원을 찾는 이들 가운데는 가족이 없거나 거처가 일정치 않아 치료를 받고도 갈 곳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2000년에는 ‘성모자헌의집’을 운영하여 일시적 쉼터로 제공하고 있으며,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을 위해 1996년부터는 ‘목동의집’도 운영해 왔다. 


이런 선우경식 원장을 두고 그 동안 언론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슈바이처’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행려병자의 천사’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그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본받아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2006년 5월 20일 뇌졸중 진단으로 수술을 받았고, 그 해 10월 23일에는 위암수술을 받았다. 그 동안 항암치료를 받는 중간에도 틈틈이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 진료를 하면서 직원들과 봉사자들을 격려해 왔는데, 그 사랑 안에서 향년 63세로 별세하였다. 선우경식 원장은 의약품과 의료기구 구입을 위해 동료의사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의혹의 시선과 무시의 눈빛을 보일 때가 가장 힘들었노라 고백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부당한 죄인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기워 갚기를 바랐고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가장 어려운 자리, 가장 가난한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이것은 신적 부르심이다. 그들은 자신의 소명, 성소를 깨달은 것이다.


이 밖에도 신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인의 고유한 심성과 영성의 조화를 이룬 사람들이다. 박해시기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성회장 강완숙 골롬바는 신분차별과 남녀차별이 뿌리 깊은 조선시대 유교적 가부장제를 뛰어넘어, 해방의 복음을 수많은 이들에게 선포한 여성 평신도 사도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토대를 닦아놓은 열성적인 평신도 강완숙은 시대의 부르심에 두려움 없이 자신을 봉헌한 평신도 운동가였다. 


▲ (사진출처=한살림사람들)


또, 무위당 장일순은 이 세상 미물 하나하나를, 순간순간에 섬기며 살다간 평신도 사회 활동가이자 ‘철저한 연대’의 영성가였다. 늘 어렴풋한 부드러움으로 모든 이를 대했지만, 최시형의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혁명적 사상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실현해갔던, 동서양의 영성을 조화시켜 낸 평신도 실천가였다. 유영모, 함석헌, 박동환이 동학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가 신을 만나는 것은 오직 역사와 인간의 삶 속에서이며 신에 대한 믿음 역시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서만 일어나는 것”이라는 기조를 일상의 삶 속에서 살아갔던 평신도가 바로 무위당 장일순이다.


이렇게 많은 평신도와 사제들이 초월하는 삶, 넘어서는 삶을 살아갔다. 이들은 그야말로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포기’란 인간이 자기 실존의 중심을 이 세상 밖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을 행동으로써, 또 눈에 보이게 고백하는 것이다. 일상 안에 이미 현존하고 있으면서 가시적으로 여전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을 가시화시키는 유일하고 구체적인 방법이 현세적인 자아를 포기하는 길이다. 더 이상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더는 자기 자신에 속하는 것이 없을 때, 그래서 나 자신마저 사라져갈 때 그때 신적인 생명, 초월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초월’은 자기 자신의 핵심으로 향하는 것이다.


저는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든 이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서 저는 주교들을 비롯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봉사하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목일꾼들의 활동을 길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세계화된 문화 상황안에서 그들이 모두 맞서야 하는 도전들에 대해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교회가 현대 세계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당당히 말씀 드립니다.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의 죄와 우리 자신의 죄로 고통과 수치를 느끼더라도, 우리는 사랑으로 헌신하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기쁨』 76항)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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