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고-김은순) 교회안의 변절자들
  • 김은순
  • 등록 2018-04-20 12:24:45
  • 수정 2018-04-24 18:09:10

기사수정



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무의식적인 행동을 한다. 숨은 속마음까지 드러난다. 그런 행동을 하며 정작 본인들은 창피함도 부끄러움도 전혀 모른다. 아니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더라도 타인에게 드러내면 안 된다. 


요즘 ‘변절자’가 되어가는 교회 사람들을 목격하며 씁쓸하다. 한 때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 변절자가 된 경우는 많이 봤다. 충주성심맹아원 김주희 양 의문사 사건에 연대하며 교회 사람들의 숨은 생각과 속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마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듯이 말이다.


‘사과할 만큼 했다’, ‘워낙 아픈 아이였다’, ‘보상금이 작아 합의 안 했다’, ‘교회 안 좋은 일들을 꼭 떠벌리고 다닐 필요 있냐’ 등등 교회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은 세월호 유족들에게 비난했던 말들과 비슷하다. 소위 정의롭다는 사제도, 수도자도 신자들도 누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실은, 한 장애아동이 죽었는데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온 몸에 상처와 상흔을 남기고 죽은 거고, 범인이 밝혀지지도 않았고, 공식적인 사죄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한 아이의 억울한 죽음, 한 가정을 처참히 짓밟더라도 거룩해 보이는 교회의 안위만 중요했던 그들이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이런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복음도 양심도 다 팔아먹은 변절자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 곳곳에서 화를 내시며 저주의 말씀으로 꾸짖는다. 소위 양심에서 멀어진 변절자들 향해서 말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868항과 1869항은 다른 사람의 죄에 협력한 사람의 책임과 죄의 결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죄는 개인적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에 협력하면 거기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그 죄에 직접, 고의적으로 관여함으로써 / 그 죄를 명령하거나 권하거나 칭찬하거나 승인함으로써 / 그것을 알릴 의무가 있을 때 알리지 않거나 / 막을 의무가 있을 때 막지 않음으로써 /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호함으로써. (1868항)


이처럼 죄는 사람들을 서로 공범이 되게 하고, 그들 사이에 탐욕과 폭력과 불의가 만연하게 한다. 죄는 하느님의 선하심에 반대되는 사회적 상황과 제도를 유발한다. 


‘죄의 구조들’은 개인들이 지은 죄의 표현이며 결과이다. 이 구조들이 다시 그 구조의 희생자들을 같은 악을 저지르도록 끌어들인다. 유비적인 의미에서 이 구조들은 “사회적 죄(세상의 죄)”를 구성한다. (1869항)


그렇다. 침묵도 일종의 공범자들이다. 양심 있는 경찰도 내용을 보고 좋은 일 하신다고 전화가 오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판단하는 일을 교회 안 사람들만 애써 외면하고 싶은 거다. 알고 지내던 자매들도 전화 받기를 거부한다. 삭발한 모습도 낯설고 뭔가 나와 친한 것도 두려운가보다.


교회가 양심을 회복하는 길은 우리에게 가르쳐 온 그대로 고해성사를 청하고 하느님 앞에 화해하는 일이다. 과오를 성찰하고, 유가족에게 용서를 구하고, 책임질 것은 책임지면 된다. 이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주님과 일치되게 해 주는 유일한 길이다.


복음대로 살려면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감수해야만 한다. 가시 돋친 말들과 따돌림을 받을수록 주님과 일치되는 길을 배우고, 그런 과정 속에 말씀이 내 안에서 퍼즐 맞추듯 하나씩 완성된다. 이 기쁨과 평화는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질 때만 비로소 얻는 기쁨이고 평화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 8, 32)




[필진정보]
김은순 프란치스카 : 전) 천주교청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