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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4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6-08 12:55:41
  • 수정 2015-08-20 12: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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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가 1,39-56)




마태오복음 1,2장, 루가복음 2장과 달리 요셉의 역할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39절 he oreine는 서쪽으로 쉐펠라, 동쪽으로 요르단 분지, 남쪽으로 네겝 사막 사이에 있는 산악지방을 가리키는 단어다.(민수기 13,29; 예레미아 40,13) 갈릴래아 저지대에 살던 어린 소녀가 높은 산악지방으로 올라가는 일은 평범하지 않다.


마리아의 인사를 들었을 때 태중에서 뛰놀던 요한 이야기는 어머니 레베카 태중에 있던 야곱과 에사우 이야기를 떠올린다.(창세기 25,22) 세례자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 자신의 임무를 깨달았다는 것을 루가는 말하고 싶었다. 42절 ‘큰 소리로 외쳤다’는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의 예언자적 행동을 가리킨다. 예언자 아들을 가진 어머니도 예언자 역할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찬미는 언어뿐 아니라 몸동작으로 나타난다. 몸으로 하느님께 찬미하는 모습은 유럽 그리스도교에서 억제되었지만,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활발하다. Feuerbach 말대로 고통은 생각보다 먼저 오듯이, 기도는 언어보다 몸으로 먼저 오지 않을까.


신학은 언어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한다. 여성신학자가 많아져야, 평신도 신학자가 많아져야, 몸을 이용한 기도와 신학이 제대로 강조될 수 있을까. 신학자 대부분 성직자이다 보니, 신학 연구와 가르침에서 아쉬운 부분이 참 많다.


루가는 이미 독립된 노래로 있던 전승을 받아들여 이 대목에 실었다. 비슷한 노래가 공동성서 여러 곳에 보이지만(탈출기 15,1-18;19-21; 신명기 32,1-43; 판관기 5,1-31), 특히 한나의 노래가 주목되고 있다.(사무엘상 2,1-10) 마리아의 노래는 개인 기도로 불려진 것 같다. 공동체가 같이 부르자는 암시는 이 기도에 없다.


하느님이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간접적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 후 이 노래는 교회에서 마리아찬가로 불려왔다. 성서 사본들을 근거로 노래를 누가 불렀는지 논란되어 왔다. 엘리사벳이 아니라 마리아가 부른 것 같다. 마리아찬가에 엘리사벳이나 세례자 요한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46절 이하에 소개된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여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칼 라너의 유명한 책 ‘말씀을 듣는 사람’의 좋은 예가 마리아다. 영혼psyche, 마음pneuma은 마리아 자신을 가리킨다.


노래 첫 부분에 감사의 대목이 나온다.(시편 9,2-; 30,2; 138,1-) 이름 없는 동네의 비천한 소녀를 하느님이 알아주셨음에 마리아는 감사드린다.(창세기 29,32) 하느님이 마리아를 선택하신 행동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시킨 경험과 이어지고 있다.(신명기 10,21) 여인을 차별하던 사회적 통념을 뒤집어 버리는 통쾌한 장면이 루가복음 곳곳에 있다.


48절 비천한tapeinos는 그리스어와 신약성서에서 사회적, 경제적 차원에서 해석되는 단어다. 마리아가 가난한 계층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겸손하다.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겸손한 점도 있다. 49절에서 하느님의 크신 일을 마리아는 떠올리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와 본질을 철학적으로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역사에서 하신 행동을 기억하는 것이다. 신학은 존재론보다 역사를 먼저 다루어야 한다. 서양신학은 역사보다 존재론을 더 중시해온 경향이 있다. 신학은 존재, 본질보다 역사, 현실을 먼저 보아야 한다. 로메로 대주교는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일을 아주 강조하였다.


52절은 잘못된 사회질서와 신분체제를 뒤엎은 해방자 하느님을 노래하고 있다. 유다교에서 하느님에 대한 모든 찬미노래와 기도는 이집트에서 해방체험을 근거로 한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미사, 예배, 기도에서 하느님을 찬미할 때, 이집트 억압에서 해방 사건을 떠올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하느님은 권력자를 심판하고 부자를 내쫓으며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분이다.(이사야 2,11-17; 욥기 12,14-25)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느님뿐 아니라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버리는 하느님을 강조해야 한다.


원래 그리스도교는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불편하고 까다로운 종교다. 그런데 어느새 그들은 교회에서 잘 대접받고 있다. 교회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부자나 권력자가 얼마나 될까. 교회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부자와 권력자들을 아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52절은 공동성서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명문장이다. 하느님이 해방자이니 예수도 해방자다. 하느님에게 예수에게 해방자라는 호칭을 드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권력자나 부자여서 그럴까. 권력자나 부자를 편들어서 그럴까. 자신이 하느님께 버림받을 것을 벌써 알고 있기에 그러는 것일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이 만났다. 그녀들의 아들 예수와 요한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두 남자 베드로와 바울이 만난다. 역사는 만남의 연속이다. 예수의 선구자로서 요한의 역할, 해방자로서 하느님의 모습,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하느님의 구원 행동과 약속이 마리아찬가에서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할 뿐 아니라 잘못된 사회질서가 뒤집어지기를 바란다. 마리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일 뿐 아니라 권력이 없는 자, 굶주린 여인, 가난한 자들의 대표다. 오늘 단락에서 두 여인의 행동은 여성의 진정한 품위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인의 품위는 하느님의 해방 행동을 찬미하고 참여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데 있다.


해방자 마리아에게 해방자 예수그리스도가 나왔다. 마리아는 여성 해방신학자다. 마리아찬가는 현대에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가난을 영성적, 추상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에 반대하는 신학자들이 늘고 있다.


성서에서 가난은 우선 사회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은 윤리적 겸손으로 연결할 것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뒤엎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찬가는 전통적으로 보수파 성직자, 신학자들에게 불편한 노래였다.


지금도, 가톨릭에서 대부분 성직자인 신학자들은 여성신학과 해방신학을 멀리 하는 편이다. 여성신학과 해방신학을 학문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신학이 깊이 발전되지 않았다. 여성신학이 깊이 발전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여성은 주교나 신부보다 중요하다.”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가톨릭 신학대학의 교수 절반이 여성 평신도로 이루어질 그날이 어서 오기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마리아는 유럽의 귀족 부인이 아닌 아시아의 시골 아낙네다. 마리아는 극보수 우파 평신도가 전혀 아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군사정권에 의해 납치되고 실종된 자녀들을 찾는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들이 성서의 마리아에 가깝다. 피에타의 성모는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아보기라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녀의 몸을 만져보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 어머니들이 있다. 그 어머니들은 마리아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에서 가르치는 마리아의 모습과 오늘 마리아 찬가에서 마리아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가. 레지오 마리애가 근본주의 계열의 신심운동에 머무르면 안 된다. 교회 내 보수파의 근거지로 잘못 이용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성직자중심주의를 지탱하는 토대로 이용되면 안 된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광화문광장에 나와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기도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가톨릭의 마리아 신심은 해방자 마리아라는 성서적 이미지를 어서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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