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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노자와 교회 : 언론이 사람을 외눈박이로 만들면 안 된다
  • 김유철
  • 등록 2018-04-03 16:17:32
  • 수정 2018-04-03 16: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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寵辱若驚 총욕약경 貴大患若身 귀대환약신 何謂寵辱若驚 하위총욕약경 寵爲上辱爲下 총위상욕위하 得之若驚 득지약경 失之若驚 실지약경 是謂寵辱若驚 시위총욕약경 何謂貴大患若身 하위귀대환약신 吾所以有大患者 오소이유대환자 爲吾有身 위오유신 及吾無身 급오무신 吾有何患 오유하환 故貴以身爲天下者 고귀이신위천하자 可以寄天下 가이기천하 愛以身爲天下者 애이신위천하자 及可以託天下 급가이탁천하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2003. 삼인)


윗사람한테 사랑을 받거나 욕을 먹거나 하는 일에 흥분하니 이는 큰 병통을 제 몸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어째서 명예와 불명예를 가지고 흥분하는 것인가? 사랑을 받으면 올라가고, 욕을 먹으면 내려가는데 얻어도 흥분하고, 잃어도 흥분하니 명예도 불명예도 흥분인 것이다. 어째서 큰 병통을 제 몸처럼 귀하게 여긴다고 말하느냐? 내게 큰 병통이 있는 까닭은 내게 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게 몸이 없다면 무슨 탈이 내게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제 몸 귀하게 여기는 것과 천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동일한 사람에게는 천하를 맡길 만하고 제 몸 사랑하는 것과 천하를 사랑하는 것이 동일한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만하다. 


‘내 몸처럼’이란

무슨 의미일까?


고전 안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것이 묵자墨子의 사상이다. 무엇보다 그의 ‘서로 사랑하라’는 겸애兼愛는 혼란의 세상을 살아가던 춘추전국시대 당시의 사람들뿐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변함없는 가르침이며 회초리다. 그것은 단지 ‘좋은 말씀’이 아니라 시대의 ‘담론’으로서 숙제이며 가야 할 길이다.


묵자가 표현한 “애인약애기신 愛人若愛其身” 즉,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놀랍게도 300여년 후 예수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온전히 담긴 두 가지 계명 중 하나로 제시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22,39)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보다 앞서 노자가 말한 “애이신위천하자 愛以身爲天下者”라. 말하자면 제 몸을 천하처럼 사랑하는 것 역시 묵자와 예수의 말을 포함하는 말이다. 세 사람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연 “내 몸처럼”이란 무슨 의미일까?


‘내 몸’에 대한

교회의 생각


오래전 예수를 죽음의 늪으로 빠뜨린 유다인들의 의회에서 대사제 카야파가 했던 말은 기득권과 집권자들의 오랜 방어막처럼 활용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11,50) 그들에게 ‘온 민족’은 ‘자신들의 안녕’이었을 뿐이다. 사실 그런 논리는 우리 안에도 존재했다. 


한국천주교회는 2000년 대림절을 맞으면서 대희년과 함께 시작되는 새 천년 앞에 지난 일을 고백하는 <쇄신과 화해>를 발표했었다. 7개항으로 된 고백문의 2항에서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라고 했다. 교회가 말하는 ‘교회의 안녕’은 무엇을 위한 안녕이었을까? 일제하에서 안녕을 보장받지 않았으면 해방 후 어떤 일이 생겼을까? 죽어야 부활한다는 말은 빈 말이고 헛고백일 뿐이었다. <쇄신과 화해>가 10여 년 전 발표된 글이었지만 자신의 과오를 참회한다고 하면서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다’는 결론은 미봉책에 불과한 언 발에 오줌 누는 꼴이었다. 한마디로 그렇게 발표하는 교회가 참으로 ‘안타까웠다.’ 


▲ (사진출처=Medium)


언론이 사람을 

외눈박이로 만들면 안 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이 아예 ‘내 몸을 나처럼 사랑’하는 일은 번번이 반복한다. 1980년 광주에서 신군부세력이 민간인을 상대로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는 군사작전을 펼치던 때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마도 그 일은 두고두고 시대의 비극으로 기억될 것이며 영화, 음악, 문학 등으로 기록되고 전해지고 있다. 공식사망자 207명 부상자 2,392명 기타희생자 987명 등이 추후 집계되었지만 당시에는 수천 명의 희생자를 확인 할 길이 없이 온갖 소문이 난무할 때 유일한 천주교회 언론이었던 <가톨릭신문>은 1980년 6월1일 1면 헤드라인을 멋지게(!) 뽑았다. ‘광주 성직·수도자 전원무사’ 분명한 것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노자와 묵자와 예수의 말에서 인용되는 교회의 ‘내 몸’은 성직·수도자만도 아니고 천주교인만도 아니다. 언론이 사람들을 미치게 하거나 외눈박이로 만들면 안된다. 


2018년 상반기 개방을 앞둔 서울 서소문역사공원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국순교자들 중 성인품에 오른 44명을 비롯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현장이기도 하며 2014년 8월 교종 프란치스코의 방문으로 더욱 알려진 곳이지만 그곳을 서울시가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역사적 관점에서 천주교회의 일방통행에 대한 많은 우려와 반론이 제기되었다. 서소문은 사육신이었던 성삼문, 홍경래의 난 관련자들, 개혁주의자 허균, 갑신정변의 개혁주의자들, 동학혁명과 관련된 민족사의 인물들이 처형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시 중구청은 이를 기반으로 2016년 11월 <서소문역사공원과 동학의 관련성 검증 역사고증 학술용역: 최종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천주교회에게 순교성지가 ‘내 몸’이라면 그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일까?


언론의 몫이 있다. 


현대인들에게 언론의 형태는 다양하다. 또한 언론보도의 여파는 어떤 권력보다 강렬하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지난 시절 숱한 성인들이 던지는 시대의 담론을 이제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언론이 담당하고 있다. 언론의 롤모델은 분명 예수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언론은 분별해서 전해야 한다. 그것은 “착하게 살자”는 다짐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포로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루카 4,18), 그것이 언론이다. 과연 교회는 ‘내 이웃’에 앞서 ‘내 몸’을 진정 사랑하는가? ‘내 몸’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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