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불러다오!
동생 넷을 가진 젊은이가 결혼을 했다. 시집와서 나흘 밤을 지낸 후 신부는 신방에서 나와 죽을 끓여 시동생들에게 갖다 줬다. 그런데 시동생들은 죽 그릇을 받아 들고는 “우리 이름을 말해야 죽을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시집 온지 나흘 밖에 안 되는 새색시가 넷이나 되는 시동생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겠나. 그녀가 “나는 도련님들 이름을 모릅니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 이름을 모르면 죽을 먹지 않겠습니다. 도로 가져가세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죽을 자기 방으로 가져가서 남편과 나눠 먹었다.
이튿날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신부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동생들이 내가 끊인 죽을 먹으려 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난 그들 이름을 모르는걸......’ 다음날 해 떨어진 후 신부가 카바사 뿌리를 절구에 넣어 빻고 있는데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날아들어 시끄럽게 울어댔다.
“네 시동생 이름을 가르쳐줄까? 잘 들어봐. 하나는 툼바 시쿤두, 하나는 툼바 시쿤두 무나, 하나는 툼바 카울루, 하나는 쿰바 카울루 무나......” 새색시는 새소리가 시끄러워 돌을 던져 새를 쫓았다.
다음날에도 죽을 끓여 갔지만 같은 일이 반복됐다. 신부가 카사바 뿌리를 빻고 있을 때 또 새가 날아와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녀는 이번에도 돌을 던져 쫓으려다가 새소리를 잘 들어보니 시동생들 이름이 아닌가.
그녀는 새가 가르쳐준 이름들을 잘 듣고 외워서 다음날 시동생들에게 죽을 갖다 주면서 “당신 이름은 툼바 시쿤두, 당신 이름은 툼바 시쿤두 무나, 당신은 툼바 카울루, 그리고 당신은 쿰바 카울루 무나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시동생들은 하나같이 기쁘게 웃으며 죽을 받아먹었다. 이 얘기는 송천성(宋泉盛) 교수가 《아시아 이야기 신학》에서 소개한 앙골라 민담으로서 서구그리스도교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잘못을 잘 보여준다.
선교는 시집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아프리카에 시집왔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시집 식구들 이름 외우는 것과 관습 익히는 일이었는데 그건 안 하고 자기가 만든 죽을 먹으라고 들이밀었던 거다. 시집온 신부가 아니라 정복자처럼 행동했다.
이런 일이 앙골라에서만 벌어졌겠는가. 서구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곳마다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런 신부를 반길 시집은 없다.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라틴아메리카가 이런 신부를 받아들인 건 그녀가 내민 게 죽이 아니라 총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서 이름이 갖는 의미
우리 겨레는 이름을 중시한다. 자녀에게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을 붙여주려고 우리 겨레만큼 노심초사하는 종족도 흔치 않을 거다. 심지어 돈 받고 이름 붙여주는 작명소를 찾질 않나. 고대 이스라엘도 우리 못지않게 이름을 중시했다. 이름을 생명처럼 여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라는 계명을 그들이 얼마나 중시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이름이 이름 주인의 품격과 가치를 표현한다고 믿었기에 하느님을 포함해서 그 누구의 이름도 헛되이 불러서는 안 됐다.
고대 바빌론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시쉬> Enuma Elish에는 “저 높은 하늘에 아직 이름이 없었을 때...... 이름이 불리지 않았을 때는 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았었다......”라는 구절이 있는 걸로 봐서 이게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었다. 신조차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렇듯 이름은 존재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구약성서의 사고도 이와 비슷해서 그 누구/무엇도 이름이 주어지기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창세기 2:4b-25)에서 하느님은 모든 짐승들을 아담에게 데리고 와서 그가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 지켜보셨단다. 아담이 짐승 하나하나에 붙여준 이름이 그대로 그들 이름이 됐다(창세기 2:19). 하느님의 창조행위가 이것으로 끝났고 아담은 창조에 있어서 하느님의 조력자가 됐다.
구약성서는 이름이 주인의 성격과 내면세계를 드러낸다고 믿는다. 에서는 쌍둥이 동생 야곱을 오랫동안 미워했는데 한 번은 그가 화를 내며 야곱에게 “그 녀석의 이름이 왜 야곱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 이번까지 두 번이나 저를 속였습니다. 지난번에는 맏아들의 권리를 저에게서 빼앗았고 이번에는 제가 받을 복까지 빼앗아갔습니다.”(창세기 27:36)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야곱’이란 이름이 ‘속임수’를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에서가 한 말은 그런 의미다. 야곱이 자기에게 한 짓은 그 이름에 걸맞다는 뜻이다. 또한 다윗에게 욕을 퍼부었다가 그의 분노를 산 나발에 대해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 사람은 정말 이름 그대로 못된 사람입니다. 이름도 나발인데다 하는 일도 어리석습니다.”(사무엘상 25:25)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나발’은 ‘어리석다’는 뜻이다.
‘야훼’라는 이름의 뜻
구약성서에서 이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이정도 얘기하고 ‘야훼’라는 이름에 대해 생각해보자. 야훼는 ‘역사’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고 계시하는 신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출애굽사건이다. 야훼는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나오라고 모세를 이집트로 보낼 때 자기 이름을 알려줬다. 그 이름으로 자기를 예배하고 찬양하게 하라고 말이다. 야훼는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신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대표적인 게 ‘야훼’(Yahweh)지만 그것 말고도 많은데 가나안의 대표 신 ‘엘’(El)과 관련된 이름이 가장 많다.
‘엘 샤다이’ (El Shaddai, 전능하신 하느님), ‘엘 엘룐’ (El Elyon, 지극히 높은 하느님), ‘엘 올람’ (El Olam, 영원한 하느님), ‘엘 베델’ (El Bethel, 베델의 하느님), ‘엘 로이’ (El Roi, 지켜보는 하느님), ‘엘 베리트’ (El Berith, 언약의 하느님), 엘 엘로헤-이스라엘 (El Elohe-Israel, 이스라엘의 신 하느님) 등이 그것이다. 야훼 이외에 가장 많이 불린 이름은 신을 가리키는 일반명사 ‘엘’(El)의 복수형 ‘엘로힘’(Elohim)이다.
어처구니없지만 ‘야훼’란 이름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우린 아직 모른다. 이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모른다. 먼 옛날엔 알았겠지만 거룩한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다며 발음하지 않아서 어떻게 발음하는지 잊어버렸단다. ‘야훼’라는 발음은 학자들이 추측해낸 거다.
‘여호와’는 ‘YHWH’라는 히브리어 네 개의 알파벳에 ‘주’를 의미하는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서 만들었으니 그것도 정확한 발음이 아니다. 우리말 성경 중 공동번역은 ‘야훼’로 표기했고 개역은 ‘여호와’로 표기했으며 표준새번역은 ‘주’(主)로 표기했다.
표준새번역은 하느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으려고 ‘야훼’를 ‘아도나이’ 또는 ‘하셈’으로 발음하는 유대교를 의식해서 ‘야훼’를 모조리 ‘주’(The Lord)로 바꿔버린 영어성서를 따랐다. 구약성서에 6천 번 이상 등장하는 하느님의 이름을 발음할 줄 모른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더 난처한 사실은 ‘야훼’의 뜻을 모른다는 점이다. 수많은 구약학자들과 고대 언어학자들이 야훼의 어원과 뜻을 밝히려고 애썼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많은 학자들은 ‘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하야’에서 와서 ‘있는 자’ 또는 ‘있게 하는 자’란 뜻이라고 주장한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야훼는 이름을 가르쳐 달라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라고 말했다. 이 동사가 구약성서에서 사역형으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창조자’라는 뜻을 이끌어내는 건 무리다. 결국 어원을 따져서 ‘야훼’란 이름의 의미를 밝히려는 시도는 아직은 성과가 없다. 그보다는 이름이 소개된 문맥과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서 그 의미를 따져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이름이 이스라엘에게 알려진 역사적 배경은 출애굽 사건과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된 사건이다. 야훼가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서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려 했을 때 자기 이름을 ‘야훼’라고 알려줬고, 또한 그들을 시내 산으로 이끌고 가서 계명을 주면서 언약을 맺었을 때,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라고 선언했다(출애굽기 20:2).
야훼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에게 알려진 두 사건을 보면 그 이름이 자유와 해방, 그리고 신과 언약적인 관계를 맺은 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야훼라는 이름의 어원적, 문법적인 의미는 모르지만 역사적인 정황으로 보면 야훼가 어떤 신인지 짐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해방, 자유, 언약 등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야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의 본래 의미는 그 이름으로 맹세하거나 남을 저주하지 말라는 뜻으로써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야훼의 이름으로 한 맹세나 저주는 ‘실제로’ 힘을 발휘한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이름을 헛되게 부르는 것이 엄격히 금지됐던 거다. 요즘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하느님 맙소사!”나 “God Damn it!”이란 말을 내뱉지만 옛날엔 그런 짓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둘째, 야훼가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자유를 약속하는 상황에서 계명이 주어졌으므로 거기 부합하지 않게 그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영화 <십계명> 중 둘째 계명에 관한 에피소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어느 선택에 관한 이야기
혼자 사는 늙은 의사가 있다. 전쟁 때 가족을 모두 잃은 후 줄곧 혼자 사는 그에게 유일한 말벗은 청소아주머니다. 어느 날 이웃에 사는 도로타라는 30대 여인이 그의 집을 방문한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 용기를 내서 왔다는 거다. 그녀는 입원해있는 자기 남편이 완쾌될 가능성이 있냐고 묻는다. 의사가 그의 차트를 보니 상태가 매우 안 좋았지만 그래도 치료되는 수가 있으니 단정할 수 없어서 즉답을 피한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남편이 회복될 것 같으면 중절수술을 받을 예정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기를 낳아 아기 아빠인 애인과 살겠다는 거다. 가족을 잃고 새 한 마리와 물고기 몇 마리와 함께 외롭게 사는 고지식한 의사의 소견에 임신 3개월 된 태아의 목숨이 달려 있는 셈이다.
남편과 애인과 아기가 모두 소중하지만 그녀는 전부를 가질 수는 없다. 그녀는 의사와 얘기하다 느닷없이 “신을 믿으세요?”라고 묻는다. 의사는 “내게 신은 한 분이요. 그분 하나로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말뜻이 알쏭달쏭하다.
셋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그녀 말이 맘에 들지 않아서 한 대답한 듯하다. 그녀는 “혼자만의 신인가요?”라고 묻고 의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그럼 그분께 용서를 빌어야겠군요.”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고 자리를 뜬다.
의사는 자기 의견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환자를 세심하게 살핀다. 한편 도로타는 고민 끝에 낙태수술 날짜를 잡는다. 환자의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어 의사는 자기가 말한 15%의 소생 가능성까지 무시하고 그녀에게 남편은 곧 죽을 테니 낙태하지 말라고 권한다. 도로타는 의사에게 “맹세할 수 있어요?”라고 물었고 의사는 주저 없이 “맹세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환자는 의사의 맹세와 반대로 급격히 회복된다. 의식을 되찾은 그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크게 뜨고 뭔가를 바라본다. 카메라가 그걸 따라가서 주스 잔에 빠진 벌 한 마리가 애써 거기서 빠져나오는 걸 보여준다. 장면이 바뀌어 도로타의 남편이 의사를 찾아가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그는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돌아온 자신에게 곧 아기가 태어날 거라고 말한다. 의사가 잘 됐다고 하자 그는 “아기가 생기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라고 묻는다. 의사는 전쟁 때 두 아이를 잃고 줄곧 혼자 살아온 사람이다.
맹세의 남발
사람은 남이 자기 이름을 기억해주면 좋아한다. 서두에 인용한 앙골라 민담도 이를 잘 보여준다. 계명은 ‘야훼의 이름은 불려야 한다.’는 걸 전제한다. 야훼의 이름을 부르라는 거다. 계명은 부정명령이지만 거기엔 야훼의 이름을 부르라는 긍정명령이 깔려 있다.
다만 ‘헛되게’ 또는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니 금지명령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기 전에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대단한 선물이고 특권이며 축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 사이에 관계 맺는 일은 이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야훼와 관계 맺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마태 18:20)고 하지 않았나.
예수는 당신더러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들이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했지만(마태 7:21) 이 말도 예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게 아니라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야훼’ 또는 ‘하느님’이란 말을 발음하지 않는 것은 계명의 취지를 잘못 이해한 거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식이다. 계명은 소중한 선물인 야훼의 이름과 그게 상징하는 바, 야훼와 사람 사이의 관계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고 돈독히 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지침이다.
야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른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 이름으로 맹세도 하지 않고 저주도 하지 않으면 헛되지 않게 부르는 걸까? 우선 이 계명의 뜻은 남을 속이거나 거짓을 거짓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야훼의 이름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거다. 야훼의 이름을 거짓말하는 데 동원하지 말라는 얘기다.
오늘날 ‘하느님’ 또는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특히 정치인들이 그렇다. 거짓말임이 금방 탄로가 나도 눈 한 번 꿈쩍하지 않고 맹세를 남발한다. 정치인이 맹세하면 자동적으로 그 말은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비단 정치인들만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거짓말을 믿게 만들려고 하느님 이름을 들먹인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는 예수의 말씀이 요즘처럼 절실하게 들리는 때가 없다.
의사는 계명을 어긴 걸까?
영화에서 야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른 사람이 누굴까? 다행히 등장인물이 적어서 후보자도 적다. 도로타와 그녀의 남편과 애인(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의사와 가정부가 전부다. 이 중에 의사에게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들이댄 도로타와 그 말을 듣고 맹세한 의사가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지만 정말 그렇게 간단할까? 그렇진 않을 게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선택을 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엔 쉬운 선택도 있지만 어려운 것도 적지 않은데 쉽든 어렵든 모든 선택은 곧 포기를 의미한다. ‘갑’과 ‘을’ 중에서 ‘갑’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갑’이외의 모든 걸 선택하지 않았다는, 곧 포기했다는 뜻이다.
도로타의 선택은 쉽진 않았지만 단순했다. 낙태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이니 말이다. 의사의 선택 역시 쉽지는 않지만 단순하다. 도로타 남편이 회생한다고 말할 것인가 회생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인가의 선택이니 말이다. 의사의 선택이 도로타의 것보다 복잡하긴 하다. 도로타 경우는 순수하게 개인의 결심이 선택을 좌우하지만 의사 경우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 그리고 확률이 끼어든다.
어쨌든 두 사람의 선택에 따라서 태아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 그들의 선택이 세상을 둘로 나눠서 한 편에선 아기가 태어나고 다른 편에선 아기가 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천하보다 더 소중한 생명이 말이다. 이들의 선택이 어려운 까닭은 생명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도로타 남편의 생명은 의사도 어쩔 수 없지만 태아의 생명은 그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의사의 선택을 따져보자. 환자의 회생 가능성은 의사도 모른다. 그가 가진 것은 임상경험에서 나온 15%라는 통계수치인데 그걸 개별사례에 적용할 수는 없다. 환자가 회생할 15%에 속하는지 회생 못할 85%에 속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로 대답할 수밖에 없으니 50 대 50인 거다. 그가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달라지는 건 없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가 회생하지 못할 테니 아기를 낳아 애인과 행복하게 살라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자기가 환자의 운명을 바꾸지 못하는데 태아를 죽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맹세’가 갖는 의미가 뭘까? 맹세한다고 해서 예측의 정확도가 높아질까? 설마…. 이런 미신을 불식하는 게 계명의 목적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의사가 남편이 회생할 거라고 하느님 이름으로 맹세했다면 도로타는 낙태를 실행했을 거다. 그 후 그의 예측대로 됐다면 아기는 죽고 남편은 살았으니 100점 만점에 50점은 되겠다. 만약 남편도 죽는다면 0점이 되니 평균은 25점이 된다. 남편이 살아날 거라고 맹세했을 때 평균점수는 25점이란 얘기다.
한편 남편이 죽을 거라고 맹세했다면 도로타는 아기를 낳을 것이다. 이 경우 의사의 맹세대로 남편이 죽었다면 아기를 살게 되니 50점이 되고 맹세대로 되지 않아서 남편도 살고 아기도 살면 100점이 된다. 이를 평균 내면 75점이다. 따라서 환자가 죽을 거라고 맹세하는 게 산술적으로 보면 더 이성적이다. 어떤가? 터무니없어 보이나?
사정이 이렇다면 설령 의사가 둘째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해도(영화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 맹세하라고 다그치는 도로타에게 맹세라도 해서 목숨을 살릴 기회를 갖는 게 옳지 않겠나. 의사가 이 계산을 했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그는 환자가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 맹세했다.
그는 둘째 계명을 어긴 걸까? 영화는 의사가 계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인상을 주긴 한다. 계명 준수를 엄중히 여기는 사람은 이런 의사의 태도에 공감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평균 75점을 택한 그의 선택이 합리적이긴 했다.
도로타가 남편의 회복 여부를 두고 의사에게 맹세하라고 다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맹세를 하고 아기를 가졌을까? 맹세는 관두고 그녀는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일을 얼마나 엄중하게 여겼을까?
불륜으로 잉태했으니 정죄 받아 마땅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불륜이든 아니든 그녀는 소중한 생명을 잉태하면서 하느님을 생각했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그런 그녀가 뒤늦게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의사더러 맹세하라고 다그치는 게 맞나 싶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도발이란 생각까지 든다. 낙태 결정에 대한 책임까지 하느님 이름에 얹으려 하니 이게 계명을 이중으로 범하는 게 아니면 뭘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태아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더 소중히 여긴다. 이를 확보하기 위한 안전판으로 하느님 이름까지 끌어들이면서 말이다.
사람의 생에는 예측 가능한 일이 많지 않다. 모든 게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모든 게 확실치 않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 확실성을 담보하려 한다. 나의 불완전함을 하느님의 능력으로 메우려는 유혹이다.
사람이 맹세의 유혹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불안을 덜어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말이다. 하지만 맹세를 글자 그대로 믿는 현대인이 과연 있을까? 단지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게 아닐까?
진지하지도 진실하지도 않아서 문제다!
이름은 불러야 의미가 있다. 부르지 않는 이름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사람의 이름이 자주 불려야 제 맛이듯 야훼의 이름도 자주 불려야 한다. 그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찬미하고 대화도 해야 한다. 다만 그분 이름을 부를 때는 진지하고 진실하게 부르자는 거다. 아무 뜻 없이, 진지하지도 진실하지도 않게 그분 이름을 부르지는 말자는 얘기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외치면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자기들이 저지른 살육행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라고 싶었던 거다. 근래에는 부시가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겠다며 이라크를 마구 폭격했을 때도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나치와 부시는 과연 그렇게 하면 자기들 행위가 정당화된다고 믿었을까? 정말? 악인들은 큰 거짓말을 할 때 하느님 이름을 더 힘주어서 입에 올린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하면 되는 데 말이다. 그 이상은 악에서 나온다는 말이 맞다는 걸 실감한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있다. 자기를 무작정 긍정하고 칭찬하는 얘기, 정당하지 않게 살아도 회개만 하면 문제없다는 얘기,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때 “괜찮아, 그래도 남들보다는 네가 낫거든.”이라는 얘기 등을 듣고 싶어 한다.
요즘 이런 얘기를 들려주는 교회가 많다.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복음을 들으러 가는 게 아니라 달콤한 얘기를 들으러 교회 가는 사람이 많다. 한국교회에서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란 게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긍정의 힘’이란 게 유행이다.
‘적극적 사고방식’의 최신판이다. 둘 다 그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는 좋은 얘긴데 그게 ‘복음’이라고 말하니 문제가 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걸 예수의 복음과 동일시하니까 문제란 얘기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너무 가볍게 얘기된다고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닐 게다. 교회는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 더 이상 아니고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곳도 아니며, 정의‧자유‧평화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도 아니라고 해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헛된 말만 난무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야훼의 이름이 헛되이 불리는 곳이 되고 말았다. 에베소서 4장 25, 29절은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라고 권하는데 말이다.
야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이해하는 건 옳지 않다. 계명이 본래 맹세와 관련되어 있다고 해서 거기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계명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지키자는 얘기다. 정의롭고 선한 가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야훼의 이름을 더 자주, 더 우렁차게 부르자.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하느님이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할 때는 그 이름에 합당한 말씀을 선포하자.
골로새서 3장 17절은 “말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라고 말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말은 예수가 한 말이어야 하고 그것은 예수의 삶을 보여주는 말이어야 하겠다. 누가 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예수가 살았던 삶을 살지 않는 교회가 어떻게 예수의 말을 선포할 수 있겠나 말이다.
적어도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 교회가 선포하는 말에 예수의 혼이 어떻게 담길 수 있겠나?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말에 예수의 혼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럴 어떻게 예수의 말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않으려고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유대교의 문제라면 야훼의 혼이 담겨 있지 않은 말을 야훼의 이름으로 말하고 예수의 정신이 담겨 있지 않은 말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고쳐야 할 문제다.
구약성서에서 진짜 예언자와 가짜 예언자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자기가 가짜 예언자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모두 진짜 야훼가 보낸 예언자라고 주장했고 야훼의 이름으로 말했는데 그 중에 가짜도 섞여 있지 않았나. 둘을 구별하는 기준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언자의 메시지와 삶이 일치하는지 여부였다.
말 따로 삶 따로 노는 자는 진짜 예언자가 아니란 말이다. 야훼의 이름을 진정으로 부르는가, 망령되게 부르는가도 여기 달려 있지 않을까? 그건 얼마나 화려한 수사를 구사하느냐, 말로 사람을 얼마나 잘 설득하느냐에 달린 게 아니라 메시지와 삶이 얼마나 합치하느냐에 달린 게 아닌가 말이다. ♣
곽건용 : LA항린교회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