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가난한 예수 3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6-05 10:56:35
  • 수정 2015-08-20 12:12:59

기사수정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시오.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마리아여. 당신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31 보시오, 이제 당신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당신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덮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36 당신의 친척 엘리사벳을 보시오.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습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가 1,26-38)




‘마리아 동정탄생’이라는 제목이 흔히 붙는 단락이지만, ‘성령에 의한 마리아의 놀라운 임신’이라고 좀 더 정확히 말하는 것이 좋겠다. 동정 탄생이 주제가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임신과 아기의 놀라운 미래에 대한 예언이 본문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자렛은 nazaret(마르코 1,9; 마태오 요한 1,45), nazareth(마태오 21,11; 루가 2,4, 사도행전 10,38), nazara(루가 4,16) 등 여러 이름으로 나타난다. 세포리스에서 남쪽으로 6km 떨어진 갈릴래아 저지대에 있다. 서기 3세기까지 문헌이나 비석에서 나자렛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서기 3세기까지 문헌이나 비석에서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동네였던 것 같다.


27절에서 parthenos는 동정성을 가리킨다. 유다교에서 동정성은 윤리적으로나 신비적으로 가치있게 가르치진 않았다. 그러나 유다교에서 은둔파인 에세느파는 동정성을 고귀하게 생각하였다. 루가에게 이 전승을 전한 사람들은 동정성을 높이 여기는 유다교내 개혁운동 흐름에 속했던 것 같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동정성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사도행전 21,9; 고린토전서 7,25; 요한묵시록 14,4).


유다교에서 12살 소녀는 결혼 가능한 연령이 되었다. 마리아는 아직 약혼자 요셉과 같이 살진 않지만 약혼을 통해 법적으로 혼인 상태였다. 약혼 때 약혼녀 부친에게 약혼남은 결혼지참금을 지불하고 약혼녀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약혼녀는 아직 부모의 집에 거주한다. 그 후 보통 1년 후에 결혼식이 열리곤 했다. 결혼식 전까지 약혼녀에 대한 보호권은 약혼녀의 부친이 갖는다.


초자연적 존재가 오는 장면(판관기 6,11)이나 부활하신 분이 나타남과(루가 24,15-36) 다르게, 천사가 아주 인간적인 방식으로, 마치 나그네처럼, 마리아를 방문하고 있다. 천사는 공동성서에서 익숙한 장면처럼(창세기 16,11; 판관기 13,1; 이사야 7,14) 마리아에게 아들 탄생 소식을 알린다. 그 이름은 ‘야훼가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닌 예수다. 루가복음 독자들은 마리아를 방문한 존재가 천사임을 알지만, 정작 마리아는 그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다.


28절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에 몇 성서사본은 ‘여인 중에’ 라는 단어를 적어 넣었다. 33절에서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놀랍다. 로마 식민지 치하라는 유다의 상황 탓에 정치적 메시아사상을 상징과 그림 속으로 숨겨버리고 조심하던 시대에, 루가가 이렇게 당당한 표현을 쓰다니 말이다. 34절에서 마리아의 ‘어떻게’는 나이나 불임이 아니라 동정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물음에 천사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성령 이야기를 꺼냈다.


즈카리야와 다르게 마리아의 답변은 믿음의 모범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언자들이 임무를 받을 때 하는 수락연설처럼 마리아의 답변은 의젓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고 나서 수락 발언의 첫 문장은 “저는 죄인입니다pecator suum” 였다. 그 겸손을 나도 언젠가 따르고 싶다.


예수 당시 유다교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 문화 등 외래사상에 영향 받고 있었다. 점성술과 태양신 숭배가 널리 퍼졌다. 로마황제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에 태양신을 숭배하는 관습을 들여왔다. 12월 25일 성전봉헌 축제에서 빛을 축하하는 의식을 열었다.


동정성을 높이 여기는 문화는 이집트에서 늦게 발전된 주제였다. 이러한 외래문화에 영향 받아 만들어진 전승을 성서 저자들은 예수의 참모습을 독자들에게 밝히고 설명하는데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종교학에서 연구되는 성과를 신학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예수 탄생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비교하고, 세례자 요한이 예수보다 낮은 인물이라는 말을 우리는 실컷 들어왔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연속성과 공통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둘 다 불의한 세력에 저항했고, 둘 다 권력에 의해 처형당했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을 때, 예수는 숨거나 물러서지 않고 곧 세상에 등장하였다. 그란데 신부가 살해되고 나서 로메로 대주교는 등장하였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을 이은 것처럼, 로메로 대주교는 그란데 신부를 이은 것이다. 회개에도 예언자에게도 동지와 벗은 있다. 하느님은 덕 있는 사람, 의로운 사람을 외롭게 놓아두시지 않는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는가가? 예수는 영원부터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마리아에서 탄생하는 순간에 하느님의 아들임이 비로소 우리에게 신성이 드러나는가.


성서주석학에서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예수는 영원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고 묵상하는 자세가 아름답다. 그것을 루가는 오늘 단락에서 강조하고 싶었다.


구원 역사에서 하느님이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하느님의 주도권은 인간의 응답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고 요구한다. 해방 실천에 참여하다가 자주 실망하는 사람들이 특히 새겨야 할 말이다.


우리 눈에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악인은 하루도 편하게 잠들지 못한다. 우리의 저항에 우리가 주저할 필요는 없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nanads2015-06-06 23:24:34

    가난은 교회내에 괴담같은 것으로 현실적으로 무관심합니다 부자가 대우받는 교회가되어 버렸습니다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