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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마음의 부담?
  • 지성용
  • 등록 2018-03-05 17:14:10
  • 수정 2018-03-26 11: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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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7년 4월에 발간된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 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 2016년 4월 2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사제들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는 교회와 친교를 회복하는 고백자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은 죄 때문에 손상을 입은 교회의 생명을 되살리는 효과도 있다. 교회는 ‘고해의 의무’를 철저하게 관리해 왔다. 자신이 지은 죄를 사제를 통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며 이는 칠성사 중의 하나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게(가시화)하는 은총의 통로라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매년 한 번 ‘소속 본당 사제 앞에서’ 혹은 그의 허락을 받아 다른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부활시기에 영성체를 해야 한다(제21조)는 규정을 발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시행되는 유효한 규정이다. 의사들은 환자들을 의술로 치료하기 이전에 사제를 찾아가도록 애써 권고하라고 엄명되었으니 그 까닭은 질병이 흔히 심리적 원인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4차 라테란 공의회 이전의 고해는 원래 평생에 한 번만 하는 공개적인 속죄행위였다. 교회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사회적인 제재가 따랐다. 그래서 고해를 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실재로는 자신이 범한 죄가 주위에 알려져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경우에만 어쩔 수 없이 하는 행위였다. 그로 인해 이후에는 공개적인 방식이 아닌 사제와의 사이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형식으로 변경되기 시작했다.


평생에 한 번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게 하는 고해를 1년에 한 번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니 고해의 내용이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당시에는 성적인 금기들이 상당히 많았다. 여러 가지 성행위에 대한 금지규정. 가령 생리 중, 임신 중, 수유 중의 성행위가 금지되고, 성탄과 부활,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은 성행위가 안 된다는 규정까지 개인의 구체적인 행동까지도 교회가 모두 통제를 하다 보니 당시에는 그런 유의 범죄를 고해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14세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보면 사제가 고해를 듣다가 흥분하여 그 여성을 겁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는 교회가 신자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성생활까지 개입하고, 성을 단속하는 센터처럼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금기시하는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본성이 큰 문제를 야기했고 우리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에서 발표한 “고해성사의 기원이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법에 기원이 있다”는 말에 대한 해석 여부는 신학자들의 몫이겠지만 트리엔트보다 300여 년 앞서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 규정한 제1항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를 비롯한 71개 항목에 들어 있던 제21항을 우리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라테란의 71개 항목 중 놀랍게도 현재까지 고수되고 있는 것은 제21항 고해성사에 대한 규정 하나뿐이다. 사실 당시의 규정 안에는 성직자들의 유혈결투 금지(18항)와 성당 참사들의 사생아들이 같은 성당의 참사가 되는 것을 금지(31항)하는 것뿐 아니라 제5차 십자군 파견(71항)과 같은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고백을 수반한 고해성사의 규정은 고스란히 놀라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미셀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이러한 교회의 권력침투 형태를 면밀하게 분석하여 통렬히 비판한다. “근대 사회의 고유한 특징은 사회가 성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구나 다 아는 비밀’로 이용함으로써 한 없이 그것에 대해 말하는데 열중한다는 것이다”


17세기를 성의 억압의 시대라 한다면 18세기 무렵부터는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추기는 정치적‧경제적‧종교적 선동이 일어난다. 성이 통치의 문제로 부상한 것은 사회가 인구, 어린이들의 성, 교육 제도 등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인구’ 문제가 경제적‧정치적 문제로 등장하고 이는 권력 통치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출산 장려’와 혹은 ‘산아 제한 조치’ 등으로 인구를 조종 통제 하는 데에 의학과 정신병리학은 큰 역할을 한다. 또한 형사법정에서 욕망의 제한(간통과 강간 등의 문제)은 오히려 욕망의 포화, 성적 포화의 장치가 되어 버린다. 성과 쾌락에 대한 권력의 개입이 세분화 되어 증가되고, 주변의 성적 욕망을 격리하고 증대하고, 수다스러운 관심과 농밀한 쾌락을 공고히 하는 것은 더 넓은 성의 확산을 가져오게 하였다. 즉 ‘코끼리를 생각 하지마!’라고 선언 하는 순간 코끼리는 내 머리 속에서 쿵쾅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성에 대한 통제는 여러 가지 법령들과 성교육을 통해 성의 자기 결정권이나 보호에 상당한 힘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포르노와 소위 ‘야동’이라 불리는 동영상의 유포와 매매, 다운로드는 세계 최고라는 통계는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와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욕망이나 성적인 문제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어야 할 성직자가 오히려 누구보다도 성(性)적인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되는 구조에 놓이고, 더구나 비밀리에 다양한 성생활을 고백 받는 위치에 놓이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오히려 성직자들에게는 큰 유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현재의 고해성사는 신자들에게 적지 않게 부담이 되고, 그것은 오히려 주일미사를 빠지는 방식으로 도피하여 자신의 죄를 위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뿐이다. 이렇게 교회의 중요한 칠성사의 하나인 화해의 성사, 고해성사가 신자들을 냉담한 교우로, 교회와 멀어지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눈에 보이는 은총의 표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성사를 통해 은총을 부여하고, 죄를 용서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며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0항). 그러나 현재 교회의 고해성사는 어떠한 모습이란 말인가.


고해성사가 신앙생활에 기쁨이 되는 신자들이 있겠지만 적지 않은 신자들에게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마음의 부담' 혹은 '불편함'이 되어버렸다. 신자들은 자신이 ‘고해하러 왔다’는 그 자체를 사제들이 기꺼이 북돋아 주길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회는 그 문이 항상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개방의 구체적 징표 중 한 가지는, 성령께서 이끄시어 어떤 사람이 교회에 하느님을 찾으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문이 닫혀있는 모습을 보지 않도록, 교회의 문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은총의 촉진자라기보다는 은총의 결정권자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돈을 걷는 톨게이트가 아닙니다. 교회는, 자기 나름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있는 아버지의 집인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47항)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본인의 상황을 먼저 공감해 주고 이해한 뒤에 이를 보듬으면서 시작하는 성사를 가장 이상적이라고 신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대다수 신자들은 ‘주일미사 불참죄’가 주를 이루고, 신부들은 사죄경을 동반한 십자성호를 그어주기에 바쁘다. 더구나 판공성사 때는 사람에 밀려 말을 많이 하면 뒤에서 눈치를 준다. “이렇게까지 하며 판공을 유지하는 것이 그래도 냉담자들을 줄이고 교회를 유지하는데 다행”이라고 말하며 위로하는 사제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상황을 포함한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떠나 현재 한국교회 신자들의 미사참례율은 20% 미만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왜 사제들에게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고해할 내용이 있을 때 다른 본당이나, 수도회 신부를 찾아가 고해하게 되는 것일까? 또 고해성사는 이 시대에 어떻게 이해되고 운용되어야 할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2014년 3월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중곡동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춘계 정기총회를 열고 ‘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공동사목방안’(이하 공동사목방안)을 승인했다. 공동사목방안은 크게 주일미사 참례 의무, 고해성사 의무, 고해성사 활성화를 위한 사목적 제안 등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으며,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주교회의는 ‘직업상 또는 신체적 환경적 이유로 주일미사에 일시적이건 지속 적이건 참여하지 못하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묵주기도 5단, 그 주일미사의 독서와 복음봉독, 희생과 봉사활동으로 주일미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밝혔다(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74조 4항). 그러나 주일미사 참례는 신자들이 행해야 할 최선의 의무이기에, ‘이 부득이한 경우’를 임의로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주교회의는 “성찬례는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완전한 실현”이며, 성찬례 참석 없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음을 모든 신자가 확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판공성사를 받지 못해서 미사 참석을 어려워하는 신자들을 위해 “부활 판공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는 성탄 판공이나 일 년 중 어느 때라도 고해성사를 받았다면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 한다”는 지침을 밝혔다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제90조2항). 주교회의는 고해성사를 “무거운 의무”로 여기지 말고, “자유롭게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영적 유익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고 권했다. 또한 판공성사를 냉담교우를 가르는 기준으로 삼아 온 한국교회의 관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고해성사의 본뜻을 덮어두고 고해성사를 형식화 시킬 위험이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아울러 주교회의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는 고해성사가 미사 전 짧은 시간에 집행되는 문제를 지적하며, 고해성사가 형식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주일미사 후나 특정한 날을 지정해 좀 더 여유롭게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면담식 고해성사를 원하는 신자들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지구와 대리구, 교구 차원에서 상설고해소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사제의 형식적인 훈화와 일사천리로 외우는 사죄경, 꾸짖거나 무안을 주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신학교 교육에서 상담의 기본 원리나 인간의 발달심리학 등에 대한 학습과 실습들이 있어야 할 것인데 여타 과목의 중요성으로 실재적인 학문의 전수가 어려운 것이 현재의 사제양성 교육과정의 문제들이다. 사제들의 이런 태도는 신자들이 죄 사함과 하느님의 구원 은총을 체감하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고해성사에 대한 일반신자들의 올바른 이해와 함께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들의 학문적‧영적‧실천적 쇄신이 불가피 하다는 사실을 사목자들은 직시해야 한다.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는 말했다. “해마다 고해성사를 받으라는 교회의 계명은 주관적으로도 자각한 중죄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구속력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미사의) 참회 예절이 성사적 성격을 띨 수 없다는 것은 교의가 아니다. 주일 계명을 마치 시나이 산에서 영원한 신적 계명으로 선포된 것인 양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교회의 미래상』, 분도출판 사, 1981, 180-181.)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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