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복음 선포는 10%국민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 지성용
  • 등록 2018-02-12 12:18:37
  • 수정 2018-03-26 11:05:08

기사수정


다음은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천국에 가려는 신앙이나 개인의 구원만을 위한 신앙에 초점을 두는 선교정신은 그다지 성숙한 방식의 선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대한민국 10% 국민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의 조국 오천만 겨레와 북의 삼천만 겨레, 나아가 세계시민 모두에게 동일하게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좁은 장막을 걷어내고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야 한다. 


사실 지난 시기 사회와 민중 운동에 투신했던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천주교 하면 ‘사회정의’, ‘민족통일’, ‘인권회복’, ‘사회복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같은 일에 투신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늘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만들어져 왔다. 거기에 민중의 함성, 그들의 고뇌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분노로 표출되어 시대정신의 주춧돌들을 놓게 된 것이다. 2016년 천 만 촛불민심이 박근혜 정부를 탄핵심판하기에 이르렀다. 


중세철학자들은 1270년부터 1290년까지를 아주 특별한 기간으로 보고 있다. 그 기간에 유럽에서는 큰 문화적인 사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성 토마스의 제자들인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과 성 보나벤투라의 학설에 기반을 두고 있던 절충적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네오 아우구스티니즘 간의 논쟁일 것이다. 이것은 이후 도미니칸 학파와 프란치스칸학파의 시초와 기반을 형성한다. 13세기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철학과 신학을 주도한 두 개의 거대한 사상적 흐름 안에서 우리는 두 개의 고대사상 즉, 플라톤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연속성을 발견하게 되며 후에 발견되는 낭만주의의 싹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에는 덕목과 그 덕목들에서 비롯하는 행위 안에 고유한 ‘위계’가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덕은 “사랑을 통해 움직이는 믿음”(갈라디아 5, 6)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성령이 주신 내적 은총의 가장 완벽한 외적 표현인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37항)



프란치스칸 학파는 비록 근본적인 사상과 영감이 아우구스티누스적 플라톤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패쇄된 체계를 벗어나 완성된 체계로의 길을 걷는다. 특히 그 대표적인 학자 둔스 스코투스는 이전의 사상체계를 흡수 종합하여 전체성과 구체성 안에서 이를 해석하고 완성하였다.



“인간의 추락이 그리스도의 오심의 필연적인 이유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은 범죄 할 것을 예견하고 그리스도는 강생을 통해서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간본성을 취하여 무한히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인간의 범죄가 그리스도의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나는 천사나 인간이 범죄 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그리스도는 똑같이 예정되었을 것이며 그리스도외에 다른 창조된 존재가 없다손 치더라도 그분은 예정되었음을 나는 덧 붙여 말한다. 그분은 이것을 예견하셨다. 질서에 따라 원하는 자는 우선 목적으로 원하며 그리고 나서는 즉각적으로 목적에 보다 근접한 것들을 원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최고의 목적에 따라 원의하시는데 첫째는 자기 자신과 그분에게 본질적인 모든 것을 원의하신다. 하느님과 외적인 것들과 관련해서 가장 즉각적인 질서에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혼이다. 그러므로 여하한 모든 공로와 결점 이전에 하느님은 그리스도가 위격의 일치 안에서 자신과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미리 아신다.” (김현태, 『둔스 스코투스의 철학 사상』 중).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분은 말씀하신다. “나는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다” 그렇다. 그분은 죄인을 구원 하러 오신 것이다. 하지만 죄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그리스도 강생의 직접적인, 제 일차적인 이유일 수는 없다. 그 분은 사랑이시다. 그 분은 사랑이시기에 비천한 인간의 육신을 취하셨던 것이리라. 또한 그 분은 오늘 이 순간에도 빵으로, 포도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다. 그분은 한 없이 자비롭고, 인자하시며, 우리들의 허약함을 익히 아신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사랑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하니 우리는 교황이나, 교회나, 교계제도나, 교회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과 그리스도, 성령과 은총,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실천에 대해 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안식일이나 율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제도나 율법, 형식과 틀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교회의 움직임과 운영은 제도와 틀을 정비하고, 규제하고, 통제하고, 건물을 교회로 생각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 같은 결정들을 많이 하고 있다. 교회법 1752조 마지막 항은 말한다. “(…) 아울러 교회법적 공평을 지키며 영혼들의 구원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 항상 최상의 법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례력 중에 본당 사제가 절제에 대해서는 열 번을 이야기하지만, 자비 혹은 정의에 대해서는 두세 번 정도 언급하게 되면 일종의 불균형이 생겨나게 되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론과 교리에서 더욱 존재를 드러내야 할 그러한 덕목들을 간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보다는 법에 대해, 그리스도보다는 교회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보다 교황에 대해 더욱 많이 이야기 할 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복음의 기쁨』 38항)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