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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엄마란 아플 권리도 없는 여자’
  • 전순란
  • 등록 2018-02-02 10: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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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1일 수요일, 맑음


어제 밤부터 내린 눈이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행복에 겨운 우리 대모님은 전화와 카톡으로 계산동 산허리 수녀원에 내린 눈을 실어 날랐다. 보스코의 영명축일을 축하하며, 77세 그 나이에도 눈처럼 때 묻지 않은 소녀가 대모님 안에 살아 인생을 저토록 밝게 살아가신다.


우리 귀요미 미루도 ‘효소절식 피정’ 중에도 보스코를 챙기고 파주의 눈을 사진으로 보내왔다. 풍경뿐만 아니라 함양에 눈도 좀 보내주지. 그니가 하느님께 조르면 날씨도 그니 소원대로 바꾸어주신다 하여 자칭 ‘날녀’다(실제로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지리산 자락이 너무 가물어서 눈이라도 왔으면 하는 말이다.




하루 종일 보스코와 우리 가정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이 축하의 전화와 메시지를 보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일, 더구나 ‘기도발 센’ 수녀님들께 사랑받는다는 일은 살아가는 원초적인 힘이 된다. 두 아들, 며느리 손주에게서도 축하 전화를 받고 보스코가 상당히 업되었다.


부면장댁이 전화를 했다. 쌀을 담갔다고, 가져다 가래떡을 뽑아다 먹으라고. 자기는 벌써 다 뽑았다니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다. 방앗간에 싣고 가니 고추 빻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오후 늦게나 가지러 오란다. 


화계는 경상도식으로 불친절하지만 정직하고 속 깊은 식료품 가게가 하나 있다. 시골이지만 물건들 좋고 가격도 싸서 함양읍내에 갔다 돌아오며 그곳에서 장을 봐오기도 한다. 그런데 올해는 이리저리 바빠서였는지 거의 9개월 만에 갔다. 아줌마의 얼굴이 너무 나빠 어린 딸에게 살짝 물어보니 위암이란다. 그 몸으로도 장사를 하는 아줌마를 보니 ‘엄마란 아플 권리도 없는 여자’다. 시골 할메들 삶이라는 게 죽은 듯 살고, 살았어도 세상사에, 자기 몸에는 눈감고 걷는다.




오후에 가래떡 찾으러 가는 길에 읍내 과수원 영숙씨 작업장엘 갔다. ‘이렇게 바쁠 때 반찬이라도 해다 줄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는 한탄을 들은 적 있어서다. 전국으로 택배 보낼 유과를 만드는 중이다. 정신없이 일하는 그니를 보니 내 팔자가 너무 편한 것 같아 가져간 것만 얼른 놓고 돌아나오니 그니가 따라 나오며 유과를 잔뜩 안겨준다.


거기 가는 길에 노재화 목사님이 새로 차린 매장 ‘산내들’에 들렀다. 영숙씨네 간식꺼리로 사가려 들렀는데 손님이 와 있어 아직 빵을 못 만들었단다. 재작년 늦결혼을 한 노목사, 유목사 부부는 씨 뿌리지도 않고 길쌈도 매지 않으면서 하늘의 새나 들의 백합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 없이 사는 분들 같다.




이번에 새로 문정마을 이장이 된, 영숙씨 동생 동인씨가 동네 반상회를 하러 오라고 전화를 하고 문자도 보냈다. 마을 사람이 우리 아래층 진이 아빠가 이장이 되기를 바랐지만, 구장과 그 졸개가 ‘타지 사람이어서’라고 따돌리고 선거하는 날 부르지도 않아 마을 아짐들의 계획이 무산 됐다.


회의는 남자들만 하고 여자들은 부엌방에 모여 있다. 왜 참석을 않느냐니까 회의는 남자들이 하고 여자는 결과만 들으면 된단다. 남자 대여섯 명에게 스물도 넘는 여자들이 다 맡긴다는 태도가 속상해서 나는 회의하러 간다고 일어서며 함께 가자 부추기니 절반쯤 따라 나선다.



나는 마을입구 폐교를 사서 흉물로 방치하는 마산대학에 진정서를 내자는 건, 마을쓰레기 처리 문제, 휴천재 오르는 길에 가로등 설치를 제안했다. 가로등 얘기에 구장이 자기네 논벼 생육에 이상이 생긴다고(벼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한단다) 반대한다. 너무 어두워 통행이 힘든 곳인데 15년간 구장에게 부탁해도 묵살된 일이라 내가 드디어 화를 냈다. ‘당신네 벼만큼 사람도 중요하다!’고. 남자에게 큰소리치는 여자를 생전 처음보고 놀란 아줌마들이 하나둘 자리를 뜬다. 내일쯤 마을에 어떤 말이 돌까 상상은 가지만 올 한 해는 경상도 아재들 정신이 좀 들게 뭔가 수를 쓰련다.


35년만의 월식과 ‘블러드 문’을 구경하러 테라스를 드나들며 밤늦게까지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18년 후에나 볼 수 있다니… 보스코는 천당에 가서 제일 먼저 하느님께 부탁드릴 게 지름 150억 광년의 우주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날아보는 일이라며 10여 년 전 산 중국제 천체망원경을 창고에서 꺼내다 놓고 들여다보면서 달구경에 여념이 없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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