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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노자와 교회 : 모든 서품자에게
  • 김유철
  • 등록 2018-01-09 11:47:00
  • 수정 2018-01-09 12: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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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皆之美之爲美  斯惡已 皆之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而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惟不居 是而不去(노자 2장)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것이 아름답다고 알아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것이 더러움이요, 이것이 선하다고 알아 선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선하지 아니함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말미암아 있고 없으며,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말미암아 쉽고 어려우며, 긺과 짧음은 서로 말미암아 길고 짧으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말미암아 높고 낮으며, 내는 소리와 들리는 소리는 서로 말미암아 나고 들리며, 앞과 뒤는 서로 말미암아 앞서고 뒤선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일을 무위로써 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베풀며 만물을 이루어내되 그 어떤 것도 물리치지 않으며 낳고는 그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하고는 그 한 것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선언. 사람의 선언. 자연의 선언



노자에게 ‘절대적’이란 것은 없다. 아마도 자연이란 것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한다면 분명 그러할 것이다. 모든 가치판단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며, 하물며 선과 악이며, 있음과 없음, 쉬움과 어려움, 길고 짧은 것과 높고 낮음도 서로가 말미암아 상대적인 것이며 나고 들리는 소리나 앞과 뒤 역시 서로의 있음으로 인해 가치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쪽만을 고집한다면 바로 그것이 선하지 못함이요, 그 자체가 더러움이라는 것이다. 그런 상대적 가치들 앞에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존재는 무엇이겠는가?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발표된 <세계인권선언> 1조 문항이다. 위의 문항이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한가하게 드릴지라도 인류에게는 너무도 절실한 문구이고 선언이었다. 두 번에 걸친 세계전쟁을 겪으면서 건물의 파괴보다 참혹한 인간성과 인류애에 대한 파괴를 겪은 사람들이 마치 “유레카!”를 외치듯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보편성과 존엄성의 회복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모세가 호렙산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들었던 “나는 있는 나다.”(탈출3,14)라는 말을 인류가 처음으로 자신들의 언어로 적어 내려간 것이다.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 난 다음에야 인류는 비로소.



예수의 이름으로 전파되는 것들



1980년 5월 1일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된 앨버트 노울런의 저서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됐다. “수많은 세대의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받들어 왔지만 그 예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적다. 더구나 예수가 뜻한 바를 실천에 옮긴 사람은 더욱 적다. 예수의 말은 별의 별 뜻으로 왜곡되어 아무 뜻도 없게까지 되었다. 예수의 말은 범죄를 정당화 하고 어린이들에게 겁을 주며 필부 필부들에게 어리석은 영웅심을 불어 넣는데에 이용, 아니 악용되어 왔다. 예수는 자기가 뜻한 것보다 뜻하지 않은 것으로 더 자주 찬양, 숭배 받아 왔다. 무엇 보다 큰 역설은 예수가 세상에 살면서 가장 반대하던 바에 속하던 그런 것들이 종종 되살아나서는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자기 형제들만 사랑한다면”(마태5,43-48) 그것은 말짱 ‘꽝’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짓은 누구나 하는 짓이며 하물며 위에 말한 책이 출간된 1980년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마저도 그런 행동은 식은 죽 먹기로 한다고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간곡히 요청한다.



노자에게 ‘성인’과 예수에게 ‘완전한 사람’




야구경기로 치면 퍼펙트게임의 투수 같은 일을 하란 말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으면서 그렇게 할 수는 애당초 없다. 노자나 예수는 모두 불가능한 길을 제시하는 선생들이 아니다. 오르지 못할 산을 오르라고 재촉하는 붉은 모자 조교들은 결코 아니다. 노자는 성인이 하는 일을 “말 없는 가르침을 베풀며 만물을 이루어내되 그 어떤 것도 물리치지 않으며, 낳고는 그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하고는 그 한 것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이라 한 것이며 예수는 한마디로 “사랑하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완전함이라고 했다. 예수 역시 노자처럼 인식론에서 머물지 말고 실천론을 말한 것이다. 사실 인식과 실천을 함께 간다.


글의 제목에서 <모든 서품자들>이라고 무미건조하게 말했지만 교회를 통한 모든 사제, 부제, 서원과 같은 성사의 대상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품’이란 말을 신학적이나 교회제도적인 개념에서 본다면 한없는 말의 성찬이 되겠지만 그냥 ‘하늘에서 온전히 내리는 비’로 이해하기를 바란다. 하여 모든 서품자들은 이제 수많은 일들과 만날 것이다. 그 많은 일들은 저마다의 유혹을 지니고 있고 저마다의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은 결코 다르지 않다. 아름다움과 더러움부터 시작하여 너와 나까지 모두가 경우와 입지에 따른 상대적인 것일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니 스스로 ‘서품’을 훈장으로 여기지 마라.


노자가 말하는 자연은 NATURE가 아니라 SELF-SO(스스로 그러한)으로, 예수가 섬기는 분은 GOD이 아니라 I AM (있는 나)로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서 행해야 하는 발걸음은 결코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유별난 삶이 아니다. 허리를 낮추고 신을 벗어라. 어디에 있더라도 지금 밟고 있는 자리가 ‘거룩한 땅’이다.(탈출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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