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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총을 꺼내 들며 품었던 신앙
  • 최진
  • 등록 2017-10-30 16: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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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를 사형한 장소로 추정되는 사형장. ⓒ 곽찬


묘하게도 한국 역사는 10월 26일 혁명적인 사건이 중복돼 일어났다. 지난해 촛불혁명의 동력이던 ‘최순실 태블릿 사건’이 최초 보도된 날이 10월 26일이고, 독재자 박정희가 총탄에 숨진 날도 10월 26일이다. 그리고 1909년 이날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하얼빈 역에서 주살한 날이기도 하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처단한 108주년을 맞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 이하 기념사업회)는 25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대련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 한 청년이 일본 제국주의의 수장을 처단한 역사적인 장소를 순례하기 위해서다.


천주교에서 안중근 의사는 ‘신앙심’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의인으로 불린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웠던 힘에 의한 평화에 저항하며 하느님 나라의 참된 평화를 꿈꾸고 해방자 모세처럼 민족의 자유를 위해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일제에 힘입어 교세를 확장하려던 교회는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막았다. 교회에서 그를 내쫓고 독립운동을 그만둬야만 교회로 다시 받아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참된 신앙인으로 의연하게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숭고한 의인의 정신을 기리는 순례에 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사제를 비롯한 신자들, 공무원 등 30여 명이 함께했다. 


▲ 숭고한 의인의 정신을 기리는 순례에 기념사업회 회원들과 사제를 비롯한 신자들, 공무원 등 30여 명이 함께했다. ⓒ 곽찬


청년 안중근이 맞이했을 죽음은


이번 ‘안중근의사 의거 108주년 기념행사’는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대련공항에 도착해 여순(뤼순)감옥과 여순일본관동법원 등을 순례하고 하얼빈으로 이동한다. 안중근 의사가 의거 후 재판과 옥살이, 이후 순국했던 발자취를 거꾸로 순례하는 것이다.


일주일 전만 해도 영하까지 내려갔던 여순은 순례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부터 기온이 올라, 도착 당시는 포근한 초봄 날씨였다. 여행사에서 준비한 이층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달리니 여순에 도착했다. 순례단이 처음 방문한 곳은 안중근 의사가 144일 동안 고초를 겪으며 수용됐고 순국했던 여순감옥이었다.


여순감옥 정문에 내리자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라는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 건물을 지나자, 주황색 벽돌로 지어진 감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감옥 외부는 탈옥을 막기 위해 3M가량의 높은 담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감옥 창문은 모두 쇠창살이 달려있었다.


▲ 여순감옥은 탈옥을 막기 위해 3M가량의 높은 담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 곽찬


포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들어서자 한기가 돌았다. 좁은 창문으로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는 탓도 있겠지만, 쇠문과 쇠창살로 뒤덮인 감옥 내부가 스산함을 더했다. 순례단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감옥 속을 둘러봤다.


순례단이 처음 지나가야 했던 곳은 신체검사실이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 알몸검사를 하던 곳으로 검사가 끝나면 정치범은 주황색 죄수복을, 일반 범죄자는 파란색 죄수복을 받았다. 주황색 죄수복은 주로 항일운동가 몫이었다. 


▲ 신체검사를 한 후 일반 범죄자는 파란색 죄수복, 정치범 등은 주황색 죄수복을 입었다. ⓒ 곽찬


1902년 러시아가 처음으로 설립한 후 일본에 의해 증축된 여순감옥은 당시 동북지방에서 가장 큰 감옥이었다. 동‧중‧서로 나뉘어 총 253개의 방이 있었고, 1천 명에서 많게는 2천 명까지 수용됐다. 한 방은 7명에서 10명 정도가 수용됐고 지하에는 모든 빛이 차단된 4칸의 독방이 있었다. 


감옥은 수감시설 외에도 고문실과 사형장, 그리고 생체실험실을 두고 있었다. 세 방향으로 길게 뻗은 복도는 내부 울림이 컸는데, 고문실과 사형장에서 울렸을 항일지사들의 신음과 비명이 감옥 전체에 메아리쳤을 것이다.


▲ 간수가 감시하는 자리에서 세갈래로 보이는 감옥의 복도. ⓒ 곽찬


특히, 수감자를 대상으로 하는 생체실험실도 있었다. 병든 죄수를 살리는 치료뿐 아니라, 생체실험으로 죽이는 일도 같이 이뤄졌기 때문에 약품을 보관하는 유리선반에는 치료약과 사람을 죽이는 사약이 함께 있었다. 일제는 잔혹하기로 유명한 731부대 외에도 일본군 시설 곳곳에서 생체실험을 자행했는데, 여순감옥도 그중 하나였다.


안중근, 신앙생활 회고하며 동양평화 염원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는 두 개의 옥중 서간을 집필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회고한 ‘안응칠 역사’고, 다른 하나는 ‘동양평화론’이다. 


일제는 항소 포기를 조건으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탈고할 때까지 사형집행을 미뤄주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갑작스럽게 사형을 집행했다. 그래서 동양평화론은 미완의 저서이자, 후손들이 만들어가야 할 숙제로 남았다.


동양평화는 안중근 의사에 앞서 일제가 먼저 내세웠던 논리다. 일제의 평화론을 요약하자면 일본이 동양국가들의 평화를 위해 서양 열강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주변 국가들을 침략하려는 일본 중심의 평화론이며, 약탈을 위한 거짓 평화였다. 


결국,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주살하면서 거짓 평화론도 함께 끝장났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거짓 평화론을 대체할 새로운 평화론을 만들었다. 안중근 의사의 평화론은 상생과 협력, 그리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평화론이다.


안중근 동양평화론의 특징은 약육강식 세계관을 거부하고 한‧중‧일 3국이 서로 협력해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아내자고 했다. 또한, 3국이 화합해 개화와 진보를 이뤄나가자고 제안했다. 또 3국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여순에 조직해 아시아 국가회의를 열고, 3국 공동은행을 설립해 경제적인 협력을 이루며, 공동평화군을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 안중근 의사의 옥중 서간인 ‘동양평화론’의 서문(왼쪽)과 ‘안응칠 역사’(오른쪽)


안중근 의사의 또 다른 저서 ‘안응칠 역사’는 그의 일대기를 회고한 저서다. 의사의 젊은 시절 이야기 중 절반 이상은 교회 안에서 살았던 청년의 이야기다. 18세 때 세례를 받은 이후 안중근 의사는 청년으로, 교리교사로, 선교사로 살았다. 


안중근 의사는 프랑스인 빌렘(Nicolas Joseph Mare Wilhelm, 한글명 홍석구)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한 후 신부를 보좌하며 황해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비자 교리를 가르칠 정도로 신학 지식이 탄탄했고, 선교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해 수년간을 선교사로 활동했다. 여순감옥에 수용돼서도 그는 가톨릭 교리를 정리하며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집행 전, 빌렘 신부에게 성사를 요청했다. 앞서 교회는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그만둘 것을 종용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금지를 내린 상태였는데, 빌렘 신부는 교구의 명령을 거부하고 여순감옥을 방문해 고백성사와 마지막 성체성사를 거행했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 전 뮈텔 주교(당시 조선대목구장)에게 편지를 썼는데, 자신을 외면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원망보다는 제국주의 속에 있는 교회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조선 교회가 민족 복음화를 위해 노력해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하느님 나라 정의를 가슴에 새긴 청년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기증한 안중근 의사의 흉상. ⓒ 곽찬


순례단이 이후 찾은 곳은 안중근 의사가 6차례 재판받았던 여순 일본관동법원구지 전시관이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했기 때문에 스스로가 전쟁포로임을 밝혔지만, 재판부는 국제법과 자국의 법률까지 무시한 채 재판을 서둘렀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은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는데, 의연함과 논리 정연한 언변으로 일제의 침략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이등박문을 주살한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하고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개 죄목을 논리적으로 열거했다. 안중근 의사는 그동안 일본이 외부에 알리길 꺼렸던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자신의 재판을 통해 낱낱이 드러냈다.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은 

강도질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일본 검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고 따지니, ‘강도는 죽여야 한다’고 명쾌히 답했다. 신앙인 안중근은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이 강도질 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라고 꼬집었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평화는 하느님 정의에 기초해 세워진다고 믿었다. 따라서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저항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으로써 진정한 평화가 도래한다고 믿었다. 신앙인 안중근은 거짓 평화를 퍼트리는 이등박문을 처단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해, 참된 동양평화를 꿈꿨다.


▲ 안중근 의사가 재판받던 재판장에 앉은 순례자들. ⓒ 곽찬


일본 관동법원 전시관은 여순감옥보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들은 재판의 진정한 승리자를 당시 31세의 청년 안중근으로 보도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아 수감생활을 거쳐 순국하기까지 걸었던 길에 망설임은 없었을까. 어머니가 살아계셨고 처와 자식까지 있었던 젊은 청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당당히 죽음을 향해 걸어갔고, 그의 의연함 뒤에는 천주교 4대 교리 중 하나인 하느님의 정의 상선벌악(賞善罰惡)이 있었다.


순례단은 이후 대련 북역을 거쳐 역사적인 처단 장소인 하얼빈으로 향했다. 시속 300km의 고속열차로도 4시간 이상 달려야 할 만큼 만주벌판은 광활했다. 이 넓고 추운 중국 땅 위에서 우리 선조들은 싸웠고 또 죽어갔다. 


하얼빈에 도착하니, 여순과 대련보다 기온이 한참 떨어졌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이 반나절도 안남은 시간에 순례단은 숙소에 짐을 풀고 역사적인 하루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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