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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배)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 김웅배
  • 등록 2017-07-03 12: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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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요한 형제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다. 베드로와 더불어 이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무척 아끼는 제자로서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에는 꼭 같이 등장한다. 혹시 직접적으로 거명되지 않았더라도 그냥 열두제자들 속에도 포함되어 있을 터이니 일상적으로 항상 예수님과 함께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루카 9,52-55) 


야고보와 요한 형제, ‘천둥의 아들들’


예수님도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과격한 성격을 보고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붙이셨을 것이다.(마르 3,17) 야고보와 요한의 이 살벌한 말투를 보면 유신 말기 박정희의 주구 노릇을 한 차지철이 부마항쟁 때 백만 정도는 쓸어버려도 괜찮다는 말을 박정희에게 서슴없이 했다는 공포의 일화가 생각날 정도다. 자신을 반대하는 집단에 대한 저주의 말이기도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자비함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그의 말에 박정희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김재규의 박정희 제거에 큰 영향을 준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 (사진출처=민중의 소리)


한편 아무리 사마리아인들의 불친절한 태도에 격분했다고 하지만 야고보와 요한의 도를 넘는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른다. 단순히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마을을 불살라 버리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무리 옛날의 얘기지만 좀 과하다. 카르멜 산에서 주님의 불길로 바알 신의 예언자들을 제압한 엘리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리라.(1열왕 18,20-40)  


성경을 보면 특히 세 제자를 편애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따라서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는 행동을 한 것은 사실 예수님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때면 항상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다니셨기 때문이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나(루카 9,51) 타볼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을 때도 아주 대놓고 세 제자만 챙기셨다.(마르 9,2) 자신의 수난을 알고 게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조차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가셨다.(마르 14,33) 열두 제자를 다 데리고 가시면 안 될 다른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인다. 게다가 다른 제자들의 시샘이 있을 것이란 의식도 별로 하지 않으신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제자들 간의 알력을 조장하면서 통제하신 것은 아닌지? 독재 정권 내내 박정희가 측근 몇 사람에게 권력을 나누어주고 서로 견제를 시키듯 말이다. 왜 그러셨을까? 


천하의 모든 이에게 사랑을 아끼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세 제자만 편애를 하셨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고 동시에 동의할 수도 없다. 아직 때가 안 되어 인성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일까? 예수님 자신도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만약 예수님이 제자 교육의 한 방편으로 특별히 그들의 방자함을 이끌어 내어 호되게 꾸지람을 주고 가르치기 위함이라면 전혀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예수님께 인사 청탁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바닥에서 서로 다투었다.(마르 9,33) 예수님이 다 들으실 정도로 눈치 없이 싸움을 크게 했다는 것은 그들의 헤게모니 쟁탈전도 치열했단 얘기다. 추측하건데 아마도 야고보와 베드로의 싸움이 집안싸움으로 번진 듯도 하다. 베드로에게는 안드레아라는 동생도 있었고 예수님께서 열병을 고쳐주셔서 예수님의 열혈 팬이 된 장모도 있었다. 야보고 에게는 동생 요한이라는 예수님의 특별한 애제자가 있었고 삯꾼을 둘 정도로 부유한 아버지 제베대오와 예수를 물심으로 도운 살로메라는 엄마도 있었다. 


사실 베드로와 야고보 사이에 힘겨루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른 제자들도 편을 갈라 이 싸움에 끼어들어 패싸움으로 번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의 나댐도 만만치 않은데 그 이유도 야고보라는 라이벌을 의식해서 나온 행동이 아닌지 의심해 볼만하다. 결국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자식들의 인사 청탁까지 하고야 말았다. 숫제 협박 같은 강요나 다름없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 


세상의 권력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부적절한 상황이 예수님 면전에서 벌어지고 만다. 세상의 재물과 딸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던 어떤 엄마가 불현듯 생각난다. 지금 감옥에 있는 분도 예수님처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님은 그때 단호히 말씀하신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닥쳐올 예수의 수난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목청껏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탐하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타이르신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5-28)


오늘의 모든 종교 지도자나 세속의 정치 지도자들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그러나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들은 이미 첫째가 되려는 의지가 없이는 권력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민의 종이 되려는 통치자가 어떤 나라에 존재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 나라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앞으로 기대하는 나라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셋을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들려주신다. 아주 심한 야단도 치고 적당히 꾸중도 하며 달래기도 하신다. 아무튼 예수님이 아끼신 세 제자의 위상은 개개인으로서의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 싼 사회 현실과도 너무나 잘 닮았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수위권을 차지한 베드로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부러움과 질시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세 제자 안에 끼지 못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의 입장도 참 안쓰럽다. 야고보의 동생 요한은 항상 주님 곁에 붙어있는데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줄 밖에 서 있다.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제자들이 겪는 인간적 갈등과 암투, 치졸한 감정싸움 등을 미루어 짐작하며 이상한(?) 안도감 속에서 마음을 추슬러 본다. 그들도 그랬는데 뭘…! 하느님의 나라는 피안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세속의 땅 위에 사는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야고보나 요한 사도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신 이유가 과격한 성격을 일부러 드러내어 그 성질을 잘 다스리려고 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성질도 급하게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의 잔’을 들고 목이 잘리는 참형으로 순교하신다. AD 44년의 일이다. 


야고보 사도는 마침내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 예수님께 “예!”라고 확실히 대답하고 또 그렇게 잔을 드셨다.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아 계실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야고보 사도의 자리가 사도의 어머니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만큼 중요한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 사도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전도를 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부터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졌고 유해가 안치된 스페인 서북쪽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가톨릭의 세계 3대 성지 순례지 중에 하나다.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렇게 해서 열렸다. 야고보 사도 축일은 휴가철 한 여름 7월 25일이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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