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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 계란을 어찌 먹으려고?"
  • 전순란
  • 등록 2015-05-26 13:3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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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4일 일요일, 맑음


오늘도 산청 ‘성심원’으로 주일미사를 드리러 갔다. ‘성령강림대축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며 당신 대신 성령을 보내 함께 계시게 손을 써 놓으셨으니 성령이 마음속에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힘들지만 지워진 삶을 말없이 살아내라는 가르침 같다. 


모진 삶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한평생처럼 고되고 욕되고 처절한 생애가 있었을까? 그리고 이곳 나환자촌에서 평생을 살다간 이들과 지금도 살고 있는 이들만큼 모진 운명이 또 있을까?



미사 중에 어제 온 김원춘님의 무용을 다시 보았다. 아들이 억울하게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명을 쓰고, 로마 당국에는 왕을 참칭한 반역죄로 허위 고발을 당해서 수난당하는 그 길을 지켜보는 성모님! “어머니, 저 좀 그만두면 안 될까요?”라는 아들의 간절한 시선을 매몰차게 뿌리치면서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서 죽으라고 떠밀고 마침내 외아들의 시체를 떠안고 우는 장면에서 많은 교우가 눈물을 흘렸다.


성심원에 갇혀 평생을 살아가는 환우들의 업보가 그 눈물에 담겨 있었다. 경호강 다리를 건너가면 지금도 버스를 탈 수도, 상점에 들어갈 수도, 식당에 갈 수도, 하숙집이나 여관에 들어갈 수도 없는("어디 문디들이 재수없게! 누구 장사 망칠 일 있어?") 저 환우들이 “어떻게 50여년을 살아올 수 있었나?” 하는 아픔이 담긴 눈물이었다.




문정마을 여교우가 내가 산청읍에서 계란을 사왔다는 말에 펄쩍 뛰며 “그게 ‘문둥이 계란’인지 어찌 알고 잡수시려는 거에요?”라고 소리치던 것이 엊그제 일이다! 아직도 한센씨병 환우를 대하는 일반 사람들(가톨릭신자라는 사람들마저도!)의 생각과 태도가 저 ‘문둥이 계란’이라는 한 마디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성심원에서는 더 이상 닭을 치지도 돼지를 치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미사가 끝나고 함께 미사 간 스.선생 부부(그리고 코이카 르완도 지부에서 일하다 일시 귀국한 분), 우릴 보러 임실에서 온 문정주 선생 부부, 무용을 한 김원춘선생과 제자, 실비아 수녀님과 대전에서 온 봉사자 두 분이 미루씨가 마련한 자리에서 커피를 들면서 한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탄탄하고 잘 짜인 그물이 엮어진다.


대부분이 성심원 내부를 모르는 손님들이어서 미루씨의 안내로, 환우들이 점심을 먹는 시간에 2, 3층을 돌아보고, 수도원과 대성당에 올라가 보고, 그 뒤에 이곳에 살다 죽어 화장하고 분골로 묻힌 환우들의 무덤을 돌아보았다.




성심원 초입에는 나룻배 한 척이 놓여 있고, 벽에도 그 나룻배가 그려져 있다. 환우들의 심경을 가장 절절하게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실비아 수녀님은 “저 나룻배를 볼 적마다 저 경호강 이쪽은 절망이 팽배하여 죽음을 기다리는 어둠의 땅이고 강 건너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의 땅,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 끝’(비목)‘으로 와 닿더라구요.”라고 하신다.



점심은 산청의 약초식당에서 ‘팔보효소’의 사장님인 미루씨가 냈다. 다들 우리 식구인데 그니에게 짐을 지워 마음이 편치 않다. 점심 후 그니의 매장에서 연꽃차를 대접받으면서 오전의 담화를 계속하다보니 세 시가 넘었다. 엊그제 양산공장에서 생식을 만드느라 지칠 대로 지쳤으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로 팽주를 하는 그니의 여린 모습이 이쁘기만 했다.


보스코는 분도에서 내는 ‘삼위일체론’의 색인을 만드는 작업이 바빠서 스.선생 차에 타고 문정리로 돌아가고, 나는 문선생 부부와 산청의 약초박물관, 화계의 구형왕릉(가락국 마지막 무영왕의 무덤)을 둘러보고 함양 상림으로 갔다. 함양의 자랑거리인 상림을 셋이서 거닐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맑은 공기과 푸른 숲과 흙길은 모두의 탄성을 자아낸다.


들양귀비가 만발한 꽃밭에도 사람들이 넘치고 발바닥 땜에 고생하는 내 사정을 배려해 주어서 그곳 산보도 무사히 마쳤다. ‘샤브향’에서 문선생 부부가 사주는 저녁을 먹고 두 분은 임실로 떠났다. 


나는 어두운 산길을 돌고 돌아, 개구리 합창이 요란한 들길을 지나서, 보스코가 책상 앞에 여념이 없을 휴천재로 돌아가는 길! 내 남편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노라니 엄엘리사벳, 남편을 옥에 두고 ‘부부의 날’이 서러웠을 여인들의 창백한 얼굴들이 지리산 산허리에 뜬 초생달에 얼비친다. 


상림 정자에서 낮잠을 즐기는 농서꾼 부부의 포개진 발을 보며 엘리사벳을 생각했고



상림의 물병아리떼를 보며 그니의 가족을 서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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