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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세상을 바라보는 생생한 눈과 희망은 시드는 법이 없다’
  • 전순란
  • 등록 2017-05-24 10:06:43
  • 수정 2017-05-24 1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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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3일 화요일, 맑음


작년 가을 누군가 패랭이꽃 모종을 잔뜩 주어 문상 안길 오르는 길옆으로 주욱 모종을 심고, 식당채 앞에도 드문드문 몇 포기 꽂아 놓고, 그래도 남아 서울집 창문 밑에도 남은 것을 다 심어 놓았다. 새로 만든 밭이라 거름도 시원찮고 무엇보다도 집 공사를 하면서 시멘트 가루가 흙과 섞여 과연 그 독에 뿌리나 내릴지 걱정했다. 그러나 옆에다 준 거름까지 훔쳐 먹었는지 주인 없던 패랭이꽃은 내가 심은 모종 중에 제일 실하게 컸다. 거칠게 엎어놓은 정원이 잠자던 뿌리에서 살아나오기 시작하자 잡초밭은 하나 둘 꽃밭으로 바뀌었다.



2003년 봄 보스코는 노무현 대통령의 특명전권대사로 바티칸에 가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학교수였던 그가 과연 어떻게 할까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런대로 열심히 했다. 노대통령은 이곳저곳 내가 꽃을 심듯 그런대로 쓸 만한 사람을 심었다.


그곳에서 지내던 같은 시간에 한국에서는 같잖은 인간들이 노 대통령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 꼴도 보고, 탄핵을 당하는 시련까지 목격하고, 갖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가슴은 무너지며 바람 앞에 촛불 보는 듯 안타까웠다. 그래도 5년이 거의 지나고 한국에 돌아올 무렵에는 시간이 무탈하게 가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임기를 마치며 웃는 얼굴을 보고는 안심했는데, 검찰 조사가 그의 죽음으로 이어진 시간은 견디기 힘든 절망의 시간이었다. 세월은 가고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데…’ ‘이대로 끝나면 억울해서 어쩌나!’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벌써 오늘로 서거 8주기가 됐다. 그동안 온갖 비웃음과 부당한 꼴을 다 보았다. 그러나 오늘 봉화마을은 슬프지만 가슴 벅찬 감회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거기에서는 희망과 생명이 보였다


신이 내게 소원을 묻는다면

나는 부나 권력을 달라고 청하지 않겠다

대신 식지 않는 뜨거운 열정과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영원히 늙지 않는 생생한 눈을 달라고 하겠다

부나 권력으로 인한 기쁨은

시간이 지나가면 시들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생생한 눈과

희망은 시드는 법이 없으니까! (키에르케고르)


간밤에 박총각친구 황총각이 왔다가 자고 아침에 2층에 와서 차를 한잔 했다. 둘은 함양중고 동창으로 둘 다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각자 하고 싶은 일에 투신하여 열심히 사느라 재미있고 행복하단다. 단지 그들의 이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모르는 사람이 모순되게도 그들의 진정한 행복을 비는 엄마라는 존재라면 슬프다. 엄마들은 내가 번듯하게 패를 흔들 수 있는 그럴듯한 출신 학교나 직장이 자랑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알아야 하는데… 엄마들이 자신을 내려놓을 때만 그 일이 가능한데




5시에 한신대 수유캠퍼스에서 김애영 교수를 친구 줄리아씨와 함께 만났다. 모교인데도 다시 지어져, 옛날 45년 전의 건물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잔디밭과 길가에 있는 나무 한 그루가 그대로 남아 있어 섭섭한 마음의 친구가 돼주었다. 국염씨에게 갖다 줄 물건이 있어 정릉 그녀의 아파트에 잠깐 들렀는데 아들 한솜이가 와 있었다. 35년 전 그 애가 어린이었을 때 처음 보았고 25년 전에 소년을 본 뒤 이젠 40대의 중후한 중년이 되어 있다. 빵고도 그애와 동갑인데 내게 있어 빵고는 아직도 어린 아이 같기만 하니 예언자가 고향에 와서는 대접을 못받는다는 말이 이런데서 나왔으리라.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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