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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포럼] 오만과 편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 조성택
  • 등록 2015-05-22 11:09:01
  • 수정 2015-05-29 11: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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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지도 밖에서 지도를 볼 필요가 때로 있다. 안에서는 전도(全圖)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종교가 늘 사회적 ‘상식’일 수는 없지만 때로는 상식의 눈으로 종교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특별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불교에서 때로 깨달음이 ‘다반사’(茶飯事)임을 솔직하게 토로하기도 하지만 그 ‘예사로움’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깨달음을 더욱 신비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불교전통 밖에서 그리고 상식의 관점에서 깨달음을 생각해보자. 우선 깨달음은 ‘신념’이 아니다. 깨달음은 스스로 또는 사회가 통상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신념을 해체하는 일이다. 주어진 의미를 확고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해체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 소위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타당성 여부는 그것이 사람이 사는 일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깨달음은 요컨대 삶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는 일이다. 사람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만약 깨달음이 좋은 것이라고 외치는 일이 있다면, 혹은 외쳐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 깨달음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회자되는 깨달음이란, 스스로 나서서 ‘깨달음은 좋은 것’이라고 외쳐야만 하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난맥상의 한 중심에는 ‘깨달음’의 문제가 있다. 요컨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거의 교과서적 지식처럼 불교계 내외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불교 고유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 동양종교, 특히 불교가 겪게 되는 식민주의가 빚어내는 문제다. 전자의 문제가 ‘도인불교’(道人佛敎)라는 말로 요약된다면 근대유럽의 식민주의가 야기하는 후자의 문제는 ‘불교는 체험의 종교’ 혹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잘못된 명제일 것이다.


한국불교 고유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깨달음 지상주의(至上主義)’ 혹은 ‘도인불교’의 폐해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편의 논문과 시사적인 글을 통해 언급해왔다. 따라서 오늘 발제에서는 지금까지 발표한 내용을 전제로 이러한 현상의 또 다른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활발한 토론을 위해 오늘날 한국불교의 대략적인 모습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졸고 “도인불교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불교”를 이 글의 말미에 별첨하고자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별첨의 글을 먼저 읽는 것이 본 발제의 요지를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일견 그렇다.

불교는 불(佛), 즉 ‘깨달은 자’(ssk. Buddha, Awakened)의 가르침이다. 불교전통은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ssk. anuttarā samyaksaṃbodhi, 최고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깨달음은 교조(敎祖) 석가모니 부처님만의 특권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또한 스승의 깨달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불교의 삼보(三寶)를 이루는 법(法)과 승(僧) 또한 깨달음에 관한 가르침이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공동체로 여겨진다.


불교사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불교학자들이 불교사는 곧 깨달음에 관한 해석의 역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승불교의 등장으로 깨달음이라는 목표가 현생(現生)이 아니라 먼 훗날 혹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미래(未來)의 일로 수정되고, ‘보살’이라는 새로운 수행주체가 등장했지만 보살의 원어(原語), ‘보디-사트바’(깨달음-존재)가 의미하는바, 깨달음은 여전히 대승불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깨달음의 역사는 인종적·문화적 경계를 넘어 확산된다. 대승불교는 동아시아에서 다시 진화하여 선불교를 낳게 된다. 선불교에서는 불보살(佛菩薩) 외에 조사(祖師, master)라는 존재가 ‘깨달음의 존재’로서 등장한다.


조사들은 깨달음이란 ‘멀리서’ 혹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장’ ‘지금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조사들은 ‘마음이 곧 부처요’(心卽佛),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이 곧 깨달음’(見性卽佛)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지는,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선종(禪宗)의 역사는 깨달음의 전승에 관한 기록이다.


위에서 약술한 내용들은 오늘날 한국불교인들이 전통이라고 믿고 있는 내용이며 불교계 바깥의 지식·교양인들 수준에서도 상식적인 불교관이다. 불교를 깨달음 전승의 역사라 믿고 깨달음을 중심으로 불교를 사유하는 이러한 불교관이 ‘교과서적’ 지식처럼 된 데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19세기 후반 시작된 유럽의 근대불교학이다.


당시 유럽학자들의 문헌학적 연구에 의해 재구성된 불교의 모습이 가장 정통적인, 본래의 ‘오리지날불교’(origianl Buddhism, 근본불교)로 간주되고, 그들이 당시 근대 동양에서 목격하고 있던 동시대의 불교는 그것에 비추어 무언가 모자라고 일종의 ‘타락한’ 형태의 불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식민주의적·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양의 불교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동양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전통을 스스로 폐기하거나 바꾸어 갔다.


유럽인들에게 불교는 일종의 계몽적인 ‘철학’이었으며 그 철학은 바로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깨달음을 영어로 ‘enlightenment’(lit. 계몽)라고 번역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한편 근대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역으로 이용하여 일본은 대승불교와 함께 그들의 ‘젠’(zen, 禪)을 동양정신의 정수로서 서양에 소개하였다. 스즈키 다이세츠 테이타로 (D.T. Suzuki, 1870-1966)가 대표적 인물이다.


D.T. 스즈키는 신지학회(神智學會) 회원이자 ‘과학적 종교’(scientific religion)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폴 캐러스(Paul Carus)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후원과 도움 하에 서구문화를 익히는 한편 (일본)불교를 서구에 소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D.T. 스즈키는 현상학과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연구에 힘입어 그들의 용어로 선불교를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면서 선불교 전통을 초역사적이며 초문화적인 어떤 ‘체험’[혹은 ‘경험’]으로 소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깨달음이란 일종의 ‘순수경험’(pure experience)이다. 이는 서구 기독교의 ‘담론적 신앙’(discursive faith)과 구별되는 불교의 특징을 ‘발명’해내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유한 D.T. 스즈키의 선불교 해석은 그 영향이 단지 서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일제강점기 이래 지금까지 ‘스즈키류’ 혹은 ‘스즈키 아류’가 한국 선불교 담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명법스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정확하다.

조선역사와 문화에 가해진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한국불교는 일본의 역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였으며 “선을 낭만화시킴으로써 서양의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사이에” 두었던 스즈키의 해석은 대부분의 한국 선불교 담론에서 반복되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출재가를 막론하고, 깨달음이라는 ‘체험’을 불교의 요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확철대오의 최종적 깨달음만을 유효한 불교 수행의 목표라 생각하고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라고 여기는 ‘깨달음 지상주의자(至上主義者)’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많은 불교인들은 - 출재가를 막론하고 또 직접 수행을 직하든 하지 않든 간에 - 근기나 수행의 방식을 따지거나 우선순위를 논할 뿐 ‘깨달음’은 여전히 중요하고 불교의 중심이며 요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을 ‘체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체험된 깨달음’만을 유효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불가피하게 개인화, 밀실화될 것이며 깨달음은 소수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이후 한국불교 전통에서 소위 ‘깨달은 자’의 말과 행위에 있어 역사적·사회적 타당성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행위를 하든 어떤 법문을 하든 그것들은 전적으로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 표현과 내용이 용납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중생이라서 그럴 뿐이다. 때로 세간에서 깨달았다고 믿고 있는 어떤 선지식의 ‘깨달음’이 유효한지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의 정도가 낮은 자신이 판단할 수 없는 문제로 유보하는 경우도 많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특권화된 영역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 금기시 된다. 강제의 의한 것이 아니라 불교인들 스스로가 언설로써 평하기를 거부하는 ‘금기의 영역’인 것이다.


종단에 비판적인 재가지식인들이나 활동가들조차도 종단의 ‘권력’과 ‘금력’에 대한 비판은 서슴지 않으면서, ‘깨달음의 영역’에 대한 의심과 비판은 ‘스스로’ 삼가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의 폐해는 출가스님의 경우보다 재가자들의 경우가 오히려 더 심각하다. 가장 큰 문제는 “깨닫지 못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하는 낮은 자존감이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불교인들에게 ‘세속’은 수행의 현장이 아니라 수행의 ‘걸림돌’로 여기진다.


“선방에서 몇 철을 수행해도 깨달을까 말까인데 세속에서 사는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불자들이 수행의 주체가 아니라 출가자들의 수행을 지켜보고 관전평을 하는 ‘관중’이 되고 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스님이 깨달았다더라” 혹은 “못 깨달았다더라” “A 스님 보다 B 스님의 깨달음이 더 크다” 등등의 관전평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깨달음은 신비한 ‘무엇’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일상적 체험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경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은연중에 깨달음을 스님들에게 기대하고 심지어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깨달음의 문제는 소통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신자들은 스님의 ‘말씀’을 이 지상의 언어가 아니라 ‘깨달음’의 초월적인 언어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소위 큰 스님의 말씀일수록 그런 기대감이 더 두드러진다.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고대한다. 불행한 일이다. 일상적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알쏭달쏭’한 법문이 때로 더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현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眞景)이다.


못 알아듣는 것은 듣는 이의 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때로 고개를 주억이며 알아듣는다고 믿게 하거나 스스로 믿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어쩌면 이런 ‘불통’의 상황 속에 스스로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이런 불통의 상황을 적절히 ‘신비화’하여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은폐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2. ‘깨달음’이라고 하는 오만과 편견


그렇다면 과연 불교의 깨달음이 일종의 ‘체험’이며 이 체험이 불교의 요체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이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만 머문다면 불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 - 때로 불교전통에서 말하는 생사의 문제 - 가 결코 작은 문제이거나 사소한 문제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개인은 개체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결코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불교라는 종교가 개인의 생사문제에만 국한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제도적 종교로서의 존립근거를 없애는 일이며 연기와 무아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사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을 거의 전적으로 어떤 특수한 심적 체험으로 환원해버린 것은 근대, 서구적 관점으로부터 온 영향이다. 부처님 이래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은 단지 어떤 경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에 이르는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로버트 지멜로(Robert Gimello)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이 의미하는 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깨달음을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 즉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깨달음이 그것에 이르는 수단과 결코 분리된 하나의 [독립된] 목적이거나 깨달음의 실현이 수행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사실은 불교 전통에서 [깨달음의] 실현과 수행이 일체(unity)라는 것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혹은 수행이 [깨달음의] 실현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의 방식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깨달음을 전적으로 자발적이고(autonomous) 자체발생적이며(self-generated), 그리고 완전히 선험적인(transcendent) 체험으로만 여기려는 경향에 대한 일종의 주의(注意)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실제로 이 점은 [불교적] 깨달음을 일종의 ‘체험’ - 순수경험, 종교적 체험 혹은 신비적 체험 등 - 으로 이해하는, 근대적이며 다분히 서구적인 관점을 차단하는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불교전통에서 ‘깨달음’(覺, ssk. bodhi)의 용례는 매우 다양하다. 보리수 아래에서 싯다르타가 체득하였던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에서부터 대승보살의 서원인 ‘발보리심’(發菩提心, ssk. bodhicittotpada)으로서의 '‘깨달음’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와 같이 시각(始覺)의 네 단계로서 범부각(凡夫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과 같은 수행과정의 단계적 깨달음이 있다. 요컨대 열반 혹은 해탈과 동의어로서 최종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으며, 시각(始覺)의 네 단계에서처럼 수행의 과정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불교교학 전통에서는 깨달음(bodhi)을, 보리분법(菩提分法, ssk. bodhipakṣa dharma) 즉 깨달음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설명하고 있다. 보리분법이 의미하는바 깨달음이란 수행의 최종적 정점만이 아니라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최근 오강남 교수와 성해영 교수는 두 사람의 대담을 책으로 엮어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를 펴내어 한국의 종교계와 학계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책에서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표층종교와 깨달음을 중요시하는 심층종교를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구별의 근저에는 ‘체험’, 특히 궁극적 실재에 대한 [깨달음의] ‘체험’이 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것에 대한 두 사람의 합치된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한국종교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동양종교에도 전문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의 장래를 염려하는 나의 입장에서 깨달음의 체험이 종교의 가장 본질적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종교에는 특히 불교와 같이 수행이 시스템적으로 내재화되어 있는 종교에서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 있을 수 있으며, 때로 그것이 수행의 진전과 정신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Zen Mind, Beginner’s Mind[선심초심(禪心初心)] 서문에서 종교학자 휴스튼 스미스(Huston Smith)가 인용하고 있는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1905-1971) 선사와의 대화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스미스 교수가 선사에게 왜 깨달음을 강조하지 않는지를 묻자, 스즈키 순류 선사는 “깨달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선에서 강조해야할 부분은 아니지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종교에 있어 체험은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특권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한국불교에서는 체험, 그것도 확철대오의 깨달음만이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을 구분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사적(私的)인 신념이나 신앙관(belief system)에서가 아니라 공적(公的)인 제도적 종교에서 ‘체험’만이 유일무이한 표준이자 진리를 판별하는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적인 오만(domatic pride)이며 수행의 일상성과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편견이다.



<별첨>

도인불교(道人佛敎)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불교


도인道人이란 흔히 세상의 이치를 추구하지만 세상과 저만치 떨어져 관조할 뿐 속된 세상과 섞이지 않는 인물을 말한다. 지금의 한국불교는 한마디로 ‘도인불교’라고 할 수 있다. 세속을 떠난 가치의 추구가 곧 불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를 ‘좀 안다고 생각’하는 불자들은 스스로 도인이 되고자 하거나 아니면 도인을 찾아다니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불자들의 수요에 맞추어 일부 스님들은 스스로 도인이 되거나 문중 전통 가운데서 ‘도인 이야기’를 생산 공급하고 있다.


불교를 쇄신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기획들이 대부분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마는 것은 이러한 도인불교가 여전히 한국의 주류불교로서 불자의 다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 본래의 ‘전통’은 무엇인가?


도인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 또한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도인불교의 프레임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원조 도인이다. 도道의 완성을 위해 세속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가족마저 버린 분이다.


대웅전의 좌불처럼 늘 명상에 잠겨 눈을 반쯤 감은 채 세상을 관조하고 계신 분, 앉아 있지만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계신 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도인불교 안에서 불교 경전의 다양한 가르침은 결국 무상과 고 그리고 공의 가르침으로 요약되고 만다. 동아시아 전통의 선사들의 삶 또한 도인불교의 프레임 안에서 해석되고 확대 재생산 된다.


70년대 ‘낭만’이란 이름의 대학문화가 있었다. 폭음과 고성방가 그리고 노상방뇨는 ‘대학시절의 낭만’이란 이름으로 미화되고 심지어 또래 동료들과 선배들에 의해 ‘장려’되기도 했다. 좌절과 방황은 대학생이 되는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나는 낭만과 방황으로 표상 되는 이러한 대학문화가 한국대학의 오랜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참 뒤에야 나는 ‘낭만’과 ‘젊음의 특권’으로 포장되었던 70년대의 대학문화가 사실은 일제 식민지 청년문화의 잔재이자 70년대 유신 통치라고 하는 시대적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


식민권력에 의해 거세된 청춘들의 좌절의 표현이었으며 그리고 유신 통치의 폭압에 대한 울분이 부정적 저항과 자학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대학시절 ‘전통’이라 생각했던 것은 전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한국불교가 ‘도인불교’를 불교 고유의 전통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불교는 고려시대 이후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조선조 오백년을 지났다. 사회적 이념이나 가치에 대해서는 어떠한 발언이나 역할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스로 새로운 시대를 도모할 현실적 힘도 의지도 없었다. 시절 인연에 순응하면서 다만 바랄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이 변하듯’ 지금의 좌절과 역경의 세월이 쉬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조선이 망하고 반세기 오백년 만에 겨우 불교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열렸지만 이내 그 공간은 처음에는 식민지 권력,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서구로부터의 개화사상과 기독교에 의해 점유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식민시절과 70년대의 왜곡된 대학문화가 한국 대학의 전통이 될 수 없듯이, 지금 한국의 도인불교는 바람직한 불교의 모습이 아닐 뿐 아니라 불교 본래의 전통이 아니다. 지금 한국의 도인불교는 오랜 세월 시대적 좌절과 현실적 한계 속에서 역사와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지 못하고 늘 그 바깥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대의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부처님은 도인이 아니라 행동가였다


도인불교를 지향해 온 결과, 지금의 한국불교는 지혜만을 추구할 뿐 실천은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서 ‘세계관으로서의 불교’만 있을 뿐 ‘실천으로서의 불교’는 없다. 조계종단 종헌에도 ‘각행원만覺行圓滿’, 즉 지혜와 실천이 함께 언급되어 있지만 실제 불교의 현장을 보면 실천은 늘 ‘부족’이거나 ‘부재’한 상태이다.


일반 불자들의 의식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거나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고 한다. 그러나 왜 깨달음이 중요한지,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 불교는 ‘세계관’이자 ‘실천’이다.


실천이 없는 세계관은 몽상이거나 공상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의식을 결한 불교는 늘 ‘과거’이며 오랜 ‘전통’일 뿐이다. 한국불교에서 소위 큰스님의 법문이란 일상적 삶에서 실천해야 할 가르침이 아니다.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세계관을 ‘훌륭한’ 법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도인불교에서 도인의 원조라고 여기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실은 ‘도인’이 아니라 행동가였다. 그래서 부처님을 가리켜 ‘명행족明行足’, 즉 지혜[明]와 실천[行]을 두루 갖추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에게서 지혜란 곧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당시 바라문들이 추구하던 ‘세 가지 지혜[三明]’를 비판하셨던 것은 그 지혜가 실천 행위를 결한 일종의 지식이자 세계관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부처님은 세속을 떠난 분이 아니었다. 한때 출가를 하셨지만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명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속을 떠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세속의 그릇된 가치관과 집착을 떠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세속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부처님 또한 스스로 버린 것은 부귀영화에 대한 세속적 관심을 버리신 것이지, 세상과 사물에 대한 선악정사善惡正邪의 판단과 실천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부처님은 세상을 떠난 분이 아니라 늘 세상과 함께 사신 분이었다. 부처님에게 ‘세속’은 떠나야 할 곳이 아니라 불교적 가치를 실현해야 할 곳이었다. 그리고 그 가치의 중점과 지향은 바로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이었다.


이제 한국불교는 도인불교의 지향과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과 떨어져 세상을 관조하는 불교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 하며 세상을 이롭게 바꾸는 불교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이와 함께, 생각하는 불교가 아니라 행동하는 불교, 관념으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불교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를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인식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이미 여러 차례 강연과 글을 통해 강조하였듯이,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실천해야 할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에서 ‘내가 곧 부처’라고 하는 자각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팔정도와 바라밀을 실천하는 일이다. 흔히 팔정도와 바라밀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으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팔정도와 바라밀은 ‘깨달음의 길’이자 동시에 ‘깨달음 이후의 실천’이기도 하다. 불교수행에 있어 깨달음의 추구와 깨달음의 실천 사이에 조금의 내용적 차이도 없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불교수행이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 ‘옳은 것’이며 ‘목적’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조성택 : 고려대 철학과 교수이며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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