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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우리 부인께서 농사를 지으십니다요”
  • 전순란
  • 등록 2016-08-26 07: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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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3일 화요일 맑음


아직 6시가 안됐다. 4시가 넘자 아직도 어둑한데 아랫집 진이아빠의 트럭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부터 책상에 앉아있는 보스코에게 내 일기 좀 (페북과 카스에) 올려 달라 부탁하고서 완전무장 차림으로 나선다. 완전무장이란 긴 바지, 팔 긴 난방, 토시, 수건, 안경(눈에 흙이 들어오지 않게), 양말, 장화, 장갑, 모기퇴치약 뿌리기, 핸드폰과 카메라... 먼 길 떠나는 것도 아닌데 채비가 수선스럽다.



보스코를 불러 쪽파 꼭지를 잘라 달라 부탁하고 나는 무씨와 당근씨를 챙긴다. 당근씨는 지금 심으면 110일 후, 그러니까 1월에나 먹을 수 있는데 과연 잘 커줄지 지켜보자. 쪽파는 그냥 덩어리진 뿌리를 쪼개 심어왔는데 ‘키 큰 아줌마’의 말대로 일일이 꼭지를 가위질하여 맨살이 잘려서 드러나게 한 다음에 심어야 한단다. 우리 교수님(그의 “내 인생의 책: 신국론”이 오늘자 경향신문 1면 우단에 실렸다!), 아침 일찍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한 바구니 되는 쪽파 뿌리에 가위질을 하는 풍경이라니...


텃밭으로 내려가 우선 고랑 주변에 올라온 잡초들을 뽑았다. 그 다음 두럭에 흙을 긁어 올려 북을 돋고 호미로 판판하게 고른 다음, 막대기로 밀어대면 잔돌이 위로 솟는다. 잔돌을 골라내면서 깊이 1cm로 잔고랑을 만들어 당근과 무의 씨앗을 5cm 간격으로 놓고 흙을 살살 덮는다.




해가 나기 시작하는데 어두울 때 내려온 지라 모자를 잊었다. 씨앗과 쪽파를 심은 이랑에다 호스로 물을 뿌리면서 목이 말라 호스 채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그때쯤 보스코가 예쁜 쟁반에 아침상을 예쁘게 차려 들고 내려왔다. 계란 2개와 방울토마토, 케이크 조각과 커피우유, 그리고 사과! 모자도 갖다 준다. 맛있게 아침 겸 새참을 먹는 농부아내를 지켜보더니 쟁반을 챙겨 올라간다. 마침 트럭으로 농장에 올라가던 진이 엄마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보스코 왈: “우리 부인께서 농사를 지으십니다요”


씨만 심고 올라가려던 계획을 바꿔 배추 심을 밭이랑과 양파 심을 밭이랑도 마저 만들고, 고랑의 풀과 꽃을 마악 피우려는 개비름은 낫으로 베고, 루콜라 밭의 바랭이와 쇠비름을 뽑았다. 방울토마토 끈도 묶어주고 배밭 방조망 밑에 웃자란 풀, 옥수수대 밑에 빌붙어 자라는 풀도 모조리 뽑았다. 여기까지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늘 과욕이 문제.


마지막 남은 대륙을 점령하러 배나무 밭 그물망을 젖히고 들어가 배나무 그늘에서 자라는 초석잠, 우엉, 울릉도취, 어성초, 참나물, 곰취, 방풍, 신선초 밭도 다 지심을 맸다. 어언 오후 1시! 보스코에게 점심 차려줄 시각! “만세!”를 부르고 돌아 나오려는 순간, 내 다초점 안경이 없어졌다! 30분을 혼자 풀밭을 더듬다가 보스코에게 S.O.S.를 쳤고, 그가 내려와 함께 찾는데도 못 찾았다. 눈 밝은 미루를 불러다 찾아달라고 해야겠지.



집으로 올라오자 팍 쓰러졌다. 새벽 6시부터 오후1시까지, 7시간의 피나는 전투(?)였다. 우선 오미자차를 한 컵 마시고 목침을 베고 30분쯤 누워있자 쿵쾅거리던 심장이 가라앉고 이장님 방송도 귀에 들어온다. “연로한 노친네들, 고추 딴답시고 들에 나가지 마시고 1시부터 5시까정은 꼭 집에 계시쇼” 소위 재난경보다. “아~ 다행. 난 1시에 집으로 들어왔으니... 아슬아슬하게 재난에 안 걸렸다!”


점심으로는 열무국수를 해서 곱빼기로 먹고, 오후 내내 누워 쉬는데 사방이 쑤신다. “이젠 한 물 갔구나!” 생각하던 참에 도정 체칠리아가 둘레길을 걷자는 전화! 저녁 6시 30분, 송문교로 내려가 체칠리아, 실비아, 나 셋이서 걸었다. 두 시간. 소나기 한 차례 있으리라던 예보도 그냥 지나가고, 검은 구름은 함양을 떠나 덕유산 자락으로 몰려갔으니 거기서도 애타게 비를 기다리는 농부들, 쩍쩍 갈라진 논바닥보다 더 갈라진 가슴 위로라도 시원한 한 줄기 쏟아주기를 빌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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