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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십자가에 숨져가던 '나자렛사람'의 시선은 무슨 빛이었을까?
  • 전순란
  • 등록 2016-08-24 13:01:08
  • 수정 2016-08-24 13: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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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2일 월요일, 맑음.


이웃동네 이장님이 내가 어제 홍지사 일로 전화만 여러번 하고 내용을 설명 안했더니 무슨 일인가, 전화해온 내가 어떤 여자인가 궁금했던지 직접 트럭을 몰고 휴천재를 찾아왔다.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면 공통분모를 찾아야 하므로 내가 아는, 그 동네로 귀농한 사람들의 이름을 댔더니 썩 탐탁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마을 원주민이거나 원주민 가족이겠다 싶어 물어 보니 문정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쌍문동에 살다가 마포로 갔고 거기서 50이 넘자 연어처럼 회향했단다.



농촌으로 돌아 온 것은 같은 처지인데 왜 두 부류는 섞이지 못할까 물어보니,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마을일에 도움은 안 되고, 이기적이고, 자신들에게 득이 되는 것만 찾아서 하니 얄밉단다. 내가 보기엔 환경운동이나 뜻있는 일에는 귀농하고 귀촌한 사람들이 훨씬 적극적인데도, 아마 경제적 정신적 측면에서 우위를 차지하다보니 원주민 눈에는 아니꼬울 수도 있겠다.


이 마을을 드나들고 휴천재를 지은 지 20년 넘고 주민등록 옮겨 귀촌한지 10여년이지만 나도 아직까지 물에 뜬 기름 같은 느낌을 받는데... 어영부영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나무나 풀처럼, 그냥 그 자리에 별 느낌 없이, 소가 닭 보듯이 닭이 소 보듯이 익숙해져 간다. 요즘은 관심도 제법 표시하고, 감자나 콩 호박 오이도 나눠준다. 매사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미운 정도 들고 고운 정이 들기까지 쉽게 포기하지 말 것. 이쁨받으러 기를 쓰지도 말 것. 먼데 사는 자식들보다 급할 때 차라도 얻어 타려면 이물 없는 이웃이 낫다는 걸 서로 알게 된다.


▲ 노목사님과 은진씨의 `홍지사소환` 문서 정리 ⓒ전순란


오늘 온 이장도 이웃을 걍 무시할 수 없어 저런 얘기를 할 꺼다. 아무튼 이장은 내가 알아내려던 일, ‘홍지사 소환운동’에 서명한 사람들의 사항을 확인해줌으로 구체적인 도움을 주었고 덕분에 은진씨가 부탁한 작업이 끝났다. 10명 중 9명에 대한 인적사항이 확인되고 정리되었다. 남은 한 명은 그 주소가 구글지도에도, 컴퓨터에도, 마을대표나 노인정에 모인 모든 할매들 알기에도, 심지어 면사무소에도 주소도 사람도 존재 않는다고 결론이 나왔다.


내가 조사한 것을 갖다 주러 빈둥에 갔더니 주민소환 신청 서류를 점검하는 일에 오늘은 노재화 목사님이 담당인지 당신 ‘안사람’인 여목사님과 함께 나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일을 하는 옆에서 여목사님은 애들 놀이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말을 눠보니 그 목사님도 내 한신 후배에다 내 동기 황성숙 목사랑 수원 농촌교회에서 4년간 함께 목회를 했단다. 세상은 칡넝쿨처럼 참 많은 인연으로 얽히고설켜 있다.


읍에 나간  길에, 보스코가 서류철을 꽂아놓을 책꽂이를 찾기에 ‘한울싱크’에 주문을 하러 갔다. 그 옆에 자동차번호판을 만드는 집이 있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이선생이 그 일을 시작했다던 말이 생각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바로 이선생네 가게다. 예고 없는 방문에 놀란 그에게 간식 대접을 잘 받고, 인사차 우리 차 앞 번호판을 주문했더니만 그만 공짜로 달아 주니 더 염치가 없었다. 




비오는 날 운전 할 때마다, 그가 선물한 CD에서 ‘율리시즈의 시선’을 들을 때마다 엘리니 카라인드루의 음울한 음악을 타고 이선생의 우울한 시선이 늘 떠올랐었다. 정말 8, 90년대에 민주화 투쟁에 청춘을 바친 분들의 눈빛에서 요즘은 늘 '율리시즈의 시선'을 느낀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을 때 처음에는 여행을, 그리고 두번째는 의심과 유토피아를 만들었어요."라는 저 영화 속의 대사처럼, 그 불타는 청춘의 정열을 아름다운 이념에 바쳤건만 지금 돌아온 이 정권의 행태는 온갖 내전과 살륙으로 폐허가 된 발칸반도의 현실로 비치지 않을까? 


민주화와 민족화해라는 유토피아의 꿈은 흔적도 안 보이고 자기가 걸어온 헌신에 대한 의심만 남은 시선들의 서글픔이다. 십자가에 숨져가던 '나자렛 사람'의 마지막 눈길도 그런 빛이 아니었을까? 그분도 '하느님 나라'라는 유토피아를 쫓다보니 거기까지 매달린 운명을 살았는데... 그래도 오늘은 이선생의 얼굴이 비교적 환하다. 아름다운 사랑을 찾았나보다.



윤희씨 가게에 들려 쪽파 씨를 얻고 무우와 당근씨들도 마련했는데 심으려니 난감했다. 이 가뭄에 싹을 틔우기나 할까 하는 내 한탄을 그분이 들으셨는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빗방울이 지기 시작한다. 




스.선생님과 체칠리아와 우리 부부는 약속대로 송문교에서 만나 6시 반부터 빗속을 용유담 쪽으로 걸었다. 얼마만인지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 귀하고도 반가워서 가끔 우산을 접고 비를 맞기도 했다. 내일 씨앗들을 심을 생각에 여러 가지 계획이 머릿속을 맴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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