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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또 한 친구의 부고를 받고
  • 전순란
  • 등록 2016-08-17 10: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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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5일 월요일, 맑음


내 일기에 ‘맑음’이란 말을 하루쯤, 아니 한 3일쯤만 쓰지 않으면 좋겠다. 모든 것을 불사르겠다는 식으로 태양은 눈부시지, 뙤약볕의 망치질을 몇 달 내내 당해야 하는 초목들은 더는 못 견디겠다고 비비 꼬이도록 말라, 길이고 잔디밭이고 텃밭까지 발 딛는대로 먼지가 퍽퍽 피어오른다. 작년에 길가에 씨 떨어져 솟아난 백일홍이나 공소입구에 옮겨 심은 백일홍도 말라죽기 직전인데도 다른 사람 눈에는 도대체 보이지도 않나보다. 물뿌리개로 물을 떠다 주고 또 주었더니, 한 시간 후에는 생기있게 되살아났다.



내가 심었기에 내 눈에 띠었겠지만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 눈에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얼마나 가엾게 보일까? 하루에도 수십종 해마다 수만종을 지구에서 멸종시키는 인간들의 꼬라지가 얼마나 기막히실까? 회복된 창조물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길은 얼마나 연민에 차 있을까?


오늘은 성모승천대축일! 내가 아직 개신교 신자였을 때도 나는 성모님을 좋아했다. 보스코의 4형제의 어머니가 되셔서 어린 고아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엄마에게 하고 싶은 모든 ‘어린양’을 다 받아주셨던 분이시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로서 유난히 성모공경을 우상숭배라고 욕했던 어떤 남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로 시작하는 성모송을 드릴 때마다 짜릿한 감격에 빠진다고 했는데, 나도 보스코랑 성무일도 저녁기도마다 ‘성모찬송’(마니피깟)을 올리면 “아! 오늘도 저분께 다 맡기고 편히 잠들겠구나!” 하는 벅찬 감사의 정이 솟는다.


미사 후에는 공소식구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식탁에 펴놓고 신부님의 축복을 받고 푸짐하게 나눠먹었다. ‘감사의 기도’는 늘 기적을 일으키고 그렇게 함께 먹는 일 자체가 은총이고 사랑이다. 샌드위치 빵, 잡채, 약밥, 감자, 토마토, 롤케이크, 야쿠르트, 수박, 부추전과 약밥, 음료수로는 커피우유, 아메리카노, 유자차, 오미자차가 차려졌다.




미사 후 집으로 올라오니 보스코 동창 창주씨가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떴다. 평생 야구선수와 야구감독과 야구심판으로 살았고 돈보다 늘 스포츠가 우선이었기에 부인의 고생이 컸었다. 그래도 신앙으로 교회 주변에서 활동하며 아이들을 키워낸 그 부인에게 친구들은 늘 고마워했다. 이제 하느님 품에서 천국야구단 감독 겸 심판장으로 활약할 게다. 그 집 아들은 보스코의 견진대자이기도 하다.


지네에 물려 하루 종일 맥을 못 추다 배탈까지 나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불쌍한 얼굴’을 했던 보스코가 친구의 마지막 길에 인사를 전하겠다고 2시 반 버스로 서울로 가고, 그를 실어다주고 돌아오던 길에 뙤약볕에 신작로를 걷던 아줌마 한 분을 싣고 오다 지곡마을의 아줌마네 집까지 들어갔다. 


때마침 아줌마네 마당에서 녹두를 수확해 발로 타작하던 아저씨에게서 녹두 한 되에 14000원, 홍화씨 한 되에 10000원을 주고 샀다. 저 곡식들이 씨뿌려져 자라고 한 되 분량의 상품이 되기까지 그 노고를 알기에 결론은 늘 “사먹는 게 젤로 싸다!” 집에 와서는 내일과 18일에 오는 손님을 맞으려 김치를 담갔다.



남편이 옆에 없는 날의 일탈을 계획하다 그래도 제일 경제적이고 제일 건전한 일을 골랐다. ‘지리산 둘레길 걷기!’ 2년간을 못 걸었노라는 도정 체칠리아, 두 달을 못 걸었다는 도메니카 1과 더불어 시원한 휴천강 따라 용유담까지 밤길을 걸었다. 금계에서 동강까지 가는, ‘지리산둘레길’ 4번 코스다.


빈소에서 밤샘을 하고 내일 새벽 6시의 장례미사를 드리고 오겠다던 보스코가 친구의 본당신부님 배려로 오늘 오후 다섯시에 장례미사와 고별식이 거행되어 자정에 떠나는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새벽 3시에 도착하는 그를 데리러 읍내로 나갔다 오니 오늘 하루 무려 세 번을 읍으로 드나들었다. 전업주부의 오늘 퇴근은 새벽 3시 45분! 특근수당은 누구한테 받지?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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