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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지네 물린 보스코, ‘땜빵 영구’
  • 전순란
  • 등록 2016-08-15 1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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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4일 일요일 맑음


미사 시작 맞추느라 부지런히 걸었다. 공소에 도착하자 그새 온몸이 땀에 젖어 닦고 또 닦아야 한다. 나를 쳐다보는 보스코의 눈이 ‘참 딱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어 기가 떨어져 그러니 좀 천천히 살라’하고 어떤 이는 ‘아직도 젊어서 순환이 잘 돼서 그러니 염려말라’하고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끊임없이 온 몸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꼴이다. “여보, 선풍기 바람이 닿으니 이쪽으로 와”라며 나를 끌어주는 남편이 그래도 고맙다.




미루에게 선물 받은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시죠?」라는 책에서. 45세의 아내가 핏줄이 터져 심각한 뇌출혈을 일으켜 뇌 조직이 많이 파괴된 상태라면서 의사가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고 수술해도 계속 혼수상태에 살게 될 거라고 남편의 결정을 재촉한다. 남편은 수술을 하라고 결정하고 그 뒤 6년 동안 그 결정을 수천 번이나 후회한다.


보스코에게 “당신이라면 어떡하겠어?” 물으니 자기도 나를 수술시키겠단다. “그럼 당신이 이 여자처럼 된 경우엔 내가 어떡하길 바래?” 물으니 수술하지 말란다. 산 채로 육체 속에 매장된 셈인데 나도 그건 원하지 않는다고, 이럴 땐 둘 다 수술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이런 문제는 하나씩 사전에 구두로나마 명시적으로 합의를 해두는 게 바람직한 나이가 됐다.


올갱이 원조 상주집에서 쫓겨나고

버섯찌개 유명한 경주집에서도

아침부터 문전박대, 푸대접 받고,

'1인분은 안 되는데요!'

문전걸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가면 밥도 팔지 않는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세상,

혼자婚子야! 그래도 나는 네가 좋다

내가 밥이다. (홍해리, “혼자”)


치매에 걸리면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데, 치매가 심할수록 본인은 행복하고 가까운 이들은 더 괴롭다. 학교에 간다고 유치원 가는 아이처럼 통학버스(?)를 타고 주간보호 시설로 가는 아내, 그 아내가 없는 점심에 요기를 하려고 식당을 기웃거리는 시인, 여기저기서 ‘1인분은 안 된다’고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 식당 주인들도 언젠가는 혼자가 되고 자기들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일이라는 걸 왜 생각 못할까? 


새벽 1시, 보스코의 신음소리에 잠을 깼다. 마치 심한 타박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머리를 싸쥐고 쩔쩔맨다. 불을 켜고 머릿속을 살펴보니 직경이 4cm쯤 빨갛게 부어올랐고 이빨 자국이 선명하다. 지네에게 물렸나보다. “어서 핸폰 찾아봅시다!” 별별 설명과 마치 119라도 불러야 하는 분위기로 겁주는 글이 있나 하면, 오이나 호박꽃을 문질러주고 벌레물린데 바르는 항생제 연고를 바르라는 곳도 있다.


강판을 찾아 오이즙을 내 마이신가루로 반죽을 해 지네 물린 곳에 붙여주었다. ‘땜빵 영구’가 영락없다. 한 20분쯤 지나니 숨이 고르다. ‘그 지네가 어디로 갔을까?’ 나는 고이 잠든 남편 곁에서 밤새 지네가 그 많은 다리로 내 얼굴을 더듬는 악몽에 시달렸다. 아침에 그놈을 잡아내긴 했지만...


어제 밤 강 건너 서강 가든 자리에 색소폰 동호회가 놀러왔는지 자정이 넘도록 시끄러웠다. 도메니카1과 저녁산보를 갔다가 그곳에 들러 악기를 조율하고 있는 남정에게 다가가 “우리 동네가 견디기에 소리가 너무 크니 재미있게 노시되 소리만 조금 줄여달라” 부탁했다. 내 행색을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알았다는 시늉을 했다. 외지에서 놀러오는 사람들이 원주민을 마치 ‘그림자 사람’처럼 무시하면 오는 사람들이야 하루 이틀이지만 동네는 여름 내내 소음에 시달린다. 오늘 문정리의 밤은 밤 벌레들의 연주로 조용하다.


테라스에는 수세미가 주렁주렁 열리고 


빵기가 휴가를 냈다. 제네바에서 제노아까지 내려가 아이들에게 ‘수족관’을 구경시켜주고 가까운 ‘친꿰 떼레’(Cinque Terre)를 관광 한 뒤(10여 년 전 내가 이콘화가 최마리아랑 다녀간 길이다) 빵고가 사목하는 밀라노 교구 관자떼성당 사제관에 도착했단다. 빵고도 조카들에게 떡국이랑 떡볶이를 해주겠다고 어제 밀라노에 가서 한국식품점에서 장을 봐왔다는데... 시아 시우 두 꼬마가 제일 좋아하는 삼촌과 만나 행복한 추억의 시간을 마련하겠지...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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