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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마누라 바가지마다 “네, 제가 배우겠습니다!”
  • 전순란
  • 등록 2016-08-08 10:26:52
  • 수정 2016-08-08 10: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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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6일 토요일, 맑음


서울에서는 ‘열대야’라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아우성이지만 그래도 이곳 지리산엔 잠드는 일은 별 염려 안 해도 된다. 우선 하루 종일 더위에 땀 빼고 일하고 나면 지쳐서라도 잠이 오고, 한낮의 열기에 특별히 달궈진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벽도 없고, 사람들이 복잡하게 서로 괴롭히거나 열 받게 하는 군상들도 TV만 안 켜면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경상도 사람들 대부분이 ‘에그, 부모도 없는 불쌍한 것’하며 봐 주는, ‘60 넘은 소녀가장’의 얼굴만 안 보면 혈압도 정상이 되는데... ‘자기가 당해봐야 안다’고 ‘성주 사드배치 반대 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의 말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1번만 찍어서 미안합니다” “세월호 가족들에게도 죄스럽습니다” “밀양 송전탑 주민들에게도 죄를 지었습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을 위해서도 싸우겠습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서만 타인의 아픔에 눈뜨게 된다. 오마이뉴스에 비치는, “조선일보가 신문이면 똥파리도 독수리다!” “조선일보 한 달 보면 멀쩡한 사람 좀비된다!” 라는 구호에서 보듯, 고통 속에서 경상도 사람들도 뒤늦게 눈뜨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곽서방은 아내 미선이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른다. 고모인 나에게 얼마나 색시 자랑을 하는지 듣고 있는 나도 흐뭇하다. “10원짜리 아껴 모아 집을 산다는 게 미선이를 보니까 맞는 말이더라”거나 “엄마 아빠 두 분의 좋은 점만 빼서 닮았다”거나 “남편을 존중하고 봐준다”며 칭찬이 입에서 마르질 않으니 나도 몰랐던 조카를 하나 더 만난 기분이다.



게다가 “이치에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 그건 아마 우리 오빠의 ‘이빨’에서 배운 바가지일 텐데, 그 때마다 곽서방은 마누라에게 “제가 배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한다나? 휴천재에서 ‘입주가정교사’에게 ‘단독과외’를 받으며 사는 보스코도 “딱 나도 그렇게 하는데!” 라고 맞장구를 친다. ‘전씨집 딸들’을 들여와 잘 산다는, 두 남자의 신앙고백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열시가 좀 넘어 은율네가 어제 놀러갔던 칠선계곡으로 다시 물놀이를 가고나자, 통영의 파스칼 형부가 황도를 사들고 오셨다. 얼마 전 혀에 딱딱한 부분이 느껴져 병원 다녀오신 얘기 중에 당신이 심한 말을 많이 해서 그리 되었다시는데, ‘독한 말’로 하자면 ‘우리집 준(準)-예언자’ 보스코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래도 아직까지 보스코 혀가 성한걸 보니 당분간 좀 더 독한 말을 해도 될 듯하다.


점심으로 감자를 갈아 야채전 부치고, 채소 겉절이와 고추 된장 무침을 했다. 옻을 많이 넣고 옻닭도 하고 우리 친정집 고명딸이 처음으로 고모집을 찾아오며 백년손님 사위도 데려왔으니 잘 모셔야 한다. 까딱 잘못 하다가는 그의 예리한 촌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빠네는 커다란 자두나무가 있어 다디단 자두가 두어 가마 열린다. 오빠가 그 집에서 유일하게 만족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매해 그 자두가 떨어질 때면 큰 그물망을 묶어 떨어지는 자두를 수확한다. 올해는 그물을 곽서방이 쳤단다. 오빠는 이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끈으로 일부러 박스를 둘둘감아 (훔쳐)온 노랑끈으로 그물을 묶는데 끝을 20센티쯤 남기고 묶었더니 그 남은 부분을 잘라 버리는 건 낭비라며 딱 2센티의 여백을 두고 묶으라고 하더란다. 저런 절약정신은 엄마를 지나 외할머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마 황해도 사람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인자 탓이리라.


몸피가 큰 곽서방은 집에서 대량으로 넉넉한 살림을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전씨집 ‘꼬꼽쟁이’ 살림에 익숙해지는 ‘문화적응기간’이 10년 갖고도 모자랄 게다. 가까이에서 걔들이 사랑스럽게 사는 모습을 보니 좋았고, 특히 딸 없는 나로서는 조카딸과 손녀의 재롱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한 1박 2일이었다. 그 모습을 내년에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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