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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배 자시느라 애 자시는구만요”
  • 전순란
  • 등록 2016-07-22 10: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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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1일 목요일, 흐림


아침 6시가 좀 지나 미루네가 도착했다. 아직 어둑한 시각. 요즘 미처 익지도 않은 배나무 밭을 떼지어 몰려다니며 온갖 횡포를 부리는 물까치 떼를 보다 못해 배나무 주인 보스코가 큰 결단을 하여 배 밭을 아예 그물로 씌우기로 했다.


우리가 마을 스피커에 대고 “마을분들, 우리집 배나무 방조망 치는데 모두 울력을 나오셔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슴다”라는 방송도 안 했지만 우리 착한 이사야와 미루가 머얼리 산청에서 일손을 도우러 왔다. 넷이서 머리를 맞대고 아이큐를 모아도 힘들 판에 철학 교수가 고안하고 설계하고 진두지휘하는 대로 가로 20m 세로 45m의 그물을 사와서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한참 그물망을 덮어 가다 보니 길이가 짧다! 저런! 우리의 ‘프락티칼 센스’ 보스코가 세로와 가로를 바꿔 작업지시를 내린 참이었다! 무조건 당긴다고 될 일도 아니고... 대충 씌우고 나머지 모자라는 부분은 나더러 기워서 느리란다!


우선 그 정도 해 두고 올라와 넷이서 아침을 먹었다. 다행히 구름이 많아 선선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귀요미’네랑 함께 하는 아침식탁은 즐거웠다. 이사야는 요즘 ‘언제나’ 쉼터에서 효소절식 명상을 하는 이들의 둘레길 걷기에 동반자로 나서느라 매일 힘든데 모처럼 쉬는 날 우리 집에 불러다 일을 시켜서 미안했다. 어제 서울에서 내려오신 파스칼 형부가 모니카 언니랑 남해로 떠나노라는 인사차 올라오셨다.


천안 정신부님이 미루를 보러 오신다는 기별이 있어, 이사야는 집에 가서 쉬라 하고, 미루는 남아서 우리랑 함께 점심대접을 하기로 했다. 다리께 국수집에서 ‘옻닭’도 한다기에 찾아가서 옻닭 한 마리를 주문하고 돌아서는데 김천 박신부님이 우리 집으로오시는 길이라는 전화를 하셔서 옻닭 한 마리를 더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 로마에서 미골을 다쳐 힘들어 하는 미루를 고쳐 주려고 박신부님이 오시는 기분이 들었고, 휴천재에 도착하신 신부님은 흔쾌히 미루에게 카이로프라틱 치료를 해주셨다. 


1시 반경 다리께 식당에 정신부님이 도착하고, 다섯 식구가 옻닭을 먹었다. 그 유명한 ‘마천 옻’을 써서 국물이 새까맣다. 먹기는 잘 먹었는데 미안하게도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오신 박신부님이 서둘러 계산을 하고 말아 우리가 대접 대신 얻어먹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점심 후 휴천재로 올라와 커피와 과자를 들면서 한참이나 담소를나누었다. 박 신부님은 먼 옛날 경험을 돌이켜 자칫 사제들이 얼마나 편하게 사는지, 그리고 고위 성직자가 얼마나 겸손하기 힘든지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는데 그 자리에 이 땅의 모든 성직자들을 대표하여 꾸지람을 듣는 이는 젊으나 젊은 정 신부님 한 분. 절대 그런 분이 아니지만 예방주사 맞았다 생각하시겠지. 다과를 마치고 박 신부님은 통영으로 떠나시고, 미루는 정 신부님을 모시고 ‘언제나’ 절식명상을 시키러 떠났다.


저녁나절에 우리 둘이서 배밭 그물작업을 마저 손질하러 내려갔다. 저 꼭대기 펄럭이는 깃발 같은 그물에 무슨 수로 바느질을 한담?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꺼야!” 어떻게든 해내라는 말이다. 보스코는 땅으로 흘러내린 그물코에 쇠파이프를 묶어서 행여 물까치가 포복으로 잠입하는 길마저 막아버렸다. 우리 부부가 작업 중인데도 물까치들이 그물망 위로 내려 앉아 안을 들여다보더니 “참 치사하다!”는 성토를 남기고 가버린다.




유영감님이 우리 작업을 보다 못해 “새는 위에서 날아 앉으니께 바느질 필요 엄서!”라며 타이른다. 새는 옆구리나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법이 없다지만 요즘 ‘디지털 시대’의 새들은 밑으로 기어들어와 옆구리로 달아난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듯하다.


블루베리 작업을 끝내고 내려오던 까밀라 아줌마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일하는 보스코와 돌팍 위에서 위태위태하게 그물코를 깁고 있는 ‘환상의 커플’을 보고 “배 자시느라고, 애 자시는구만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가신다. 그 한 마디 정겨운 인사에 둘이는 ‘빵!’ 터지면서 하루의 피로가 싹 가셨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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