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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철학교수와 ‘새대가리들’의 두뇌싸움
  • 전순란
  • 등록 2016-07-20 10: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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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9일 화요일, 흐림


밖에서 좀 쌀쌀한 바람이 불어들고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보스코의 눈치를 살피며 텃밭에 풀 좀 깎아야겠다는 말을 엊저녁에 하니까 “나 좀 다그치지 마. 할 수 있을 때 할 테니까!” 라는 쌀쌀한 대답을 들은 터여서 “맘을 고쳐먹고 벌써 텃밭에 나가 예초기를 돌리나?” 싶어 고마운 맘이 팡팡 솟았다. 


조금 뒤 예초기 소리는 여전한데 보스코가 마루에서 들어온다. 내 실망한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흥얼거린다. “꿈속에서 깨어나라, 젊은이여! 그대 사명 깨달으라, 젊은이여!” (그가 작사하고 원선오 신부님이 작곡한, ‘공동체성가집’에 실려 있던 청년들을 위한 노랫말인데 ‘마누라여!’로 바꾸면 그가 하고픈 말이 새겨진 노래가 된다)



그래도 오늘 아침엔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구름이 끼어 있어 배나무 높은 가지도 치고 풀도 깎으려던 참이야. 다만 지금 당장 아침을 먹고 내려가야 해”란다. (아침기도와 그가 특히 싫어하는 티벳요가를 생략하겠단 흥정) 보통으론 “어림없는 소리”라는 대꾸가 나올 테지만 이참에는 내가 양보했다. 나도 일복으로 갈아입고 따라내려갔다. 혼자서 밭일을 하면 지루해 할 것 같아...


우리가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어도 바로 곁 배나무에 떼로 몰려들어 배를 쪼아먹으며 깍깍거리는 물까치떼를 보다 못해 그물로 배나무를 아주 덮을 계획이다. 목요일 새벽에 미루네 이사야가 도우러 온다니까 오늘 웃자란 가지들을 쳐내어 길이 35미터, 폭 20미터의 방조망을 덮어씌우겠다는 것이 보스코의 설계다. ‘새대가리들’을 상대로 철학교수가 벌이는 두뇌싸움이지만 아무래도 노교수가 ‘새대가리들’보다는 나으리라는 희망에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텃밭 채소농사는 내 담당이고 배농사는 어차피 그의 담당이니까...


좀 있으려니까 이신부님 가족이 물을 길으러 휴천재로 올라온다. 이신부님은 마당에서 병병이 물을 받고, 두 누이는 우리 텃밭에서 루콜라를 솎고 참나물과 신선초 여린 잎을 따고 부추를 베었다. 시골 텃밭은 광처럼 인심이 펑펑 나올 만한 공간이다.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 우리 둘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모니카 언니가 점심을 해놓을 테니 공소로 내려와 함께 들잔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소린지. 그 대신 저녁은 한길가 국수집(여름에만 장사를 한다)에서 우리가 내기로 했다.



오후에는 시원한 마루에 뒹굴면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었다. 내일 느티나무독서회 과제물이기도 하다. 수사학적으로 기막힌 문장들에 찬탄을 보내면서 읽지만 수사학의 묘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왜 이리도 말을 꽈배기처럼 꼬기만 할까?” 싶을 게다.


이숭리 선생(나랑 이주여성인권센터 이사를 한다)이 모처럼 산청에 내려와 있다는 전화를 받고 저녁에 찾아보기로 했다. 이신부님네 저녁대접은 보스코와 도메니카1에게 맡기고 나는 산청 ‘율수원’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조선시대 양반대궐을 재현해 놓고 ‘한옥체험장’이라는 명목을 내거는데 오히려 귀빈접대용 시설 같았다. 



‘참새 방앗간’이라고 산청 가는 길에 미루를 안 보고 지나갈 수 없다. 때마침 ‘이태리 면(麵)사무소’라는 파스타 집에 가 있다기에 거기로 들렀다. 성심원 글라라선생과 데레사씨, 미루네 부부가 함께 있어서 나도 포크를 들고 그들 틈에 끼어 저녁을 해결했다.


미루는 아침 다섯 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묵상하고 자기 업무를 처리하는 ‘아침형’ 일꾼인데 오늘 아침 일찍 연꽃 채취까지 했다면서도 여전히 밝은 웃음으로 사람을 맞는 ‘귀요미’다. 이리저리 바빠서 연꽃 채취가 늦어졌고 그래서 수확도 적다며 아쉬워하지만 둘레길 걷는 사람들이 그의 ‘언제나’라는 효소단식 명상의 집에 들러 은은한 꽃 한 송이가 물속에서 우려내는 향내를 맡으며 마음을 다스리겠지...


숭리선생은 친구 세 명과 ‘산청문화탐방’을 내려온 길이어서 어딜 보았느냐니까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남사예담촌’, ‘성철대종사 생가’, ‘덕천서원’, ‘대원사’, ‘남명조식선생생가지’ ‘구형왕릉’, ‘가야국 덕양전’, ‘동의보감촌’을 둘러보았단다. 그 정도면 한국인 특유의 ‘말아톤식’ 관광인데 20년 넘은 지리산생활에도 우리가 대부분 못 가본 곳들이다. 타지에서 모처럼 온 사람들은 시간을 아껴 달려다니고 여기 사는 우리는 “그게 어디 가랴?” 싶어 여유만만한 까닭이리라.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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