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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시화(詩化)된 남편과 사는 기분
  • 전순란
  • 등록 2016-07-15 10:53:36
  • 수정 2016-07-15 10: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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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3일 수요일, 흐림


월간지 『전라도닷컴』을 보니 평생을 문어를 칼로 조각해 온갖 모양을 만드는 ‘문어조(文魚彫)’의 명인 황금주씨 이야기가 나온다. 열 살부터 시작하여 60이 되도록 오로지 그 일로만 반백년 세월을 보냈으니 문어와 칼이 그녀의 손에서 예술로 피어날 수밖에. 마음(心)에 칼(刀)을 올려 놓은 게 참을 인(忍) 자라니 그 어려운 가시밭길에서 스스로를 깎아 내야 무어라도 하나가 되는구나 싶다.


우리는 무얼 하다가 얼마나 쉽게 포기를 하는가! 하다못해 이 공개일기 하나를 쓰면서도 얼마나 많은 순간 ‘이제 그만 접고 싶다’거나 ‘오늘은 안 쓰면 안 되나?’하는 마음이 이는지! 그때마다 보스코가 “앞으로 3년 남았어, 힘내!”라고 격려해주기에 다시 펜을 잡는다. 그가 아니면 벌써 접었을 꺼다.


올해도 어김없이 백로가 휴천재를 찾아오고 


내 나이 30에 시작한 일 세 가지가 있다. 첫째가 ‘운전’이고. 두 번째가 ‘이탈리아 말’이고 세 번째가 ‘수영’이다. 보스코가 운전을 못하니까(=안 하니까) 나라도 배운 것은 잘한 일이고, 이탈리아말을 몰랐으면 도합 13년 이탈리아 생활이 얼마나 힘겨웠겠는가. 수영은 어린 빵고를 수영장에 데려다 주고 기다리다 배우게 되었다. 이제는 물에 들어가면 쉬지 않고 2.5Km는 헤엄칠 수 있는데 더 중요한건 ‘음~’ ‘파~’를 처음 하면서 물만 보면 죽을 것만 같던 어릴적의 공포, 걸음마를 배우던 제주 바닷가에 파도가 밀려오던 물 공포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욕심이 있다면 80년대부터 일기를 썼더라면 40년 넘는 기록이 살아남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30대의 새댁이 보고 만나고 생각했던 삶이 기록되었더라면, 1997년부터 98년까지 2년간의 꿈같던 ‘제2의 신혼생활’, 로마의 저 칼리스토 카타콤바에서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사람들이 희미한 기억 속에서만 가물거리는 아쉬움, 2003~2007년 대사부인으로 보냈던 값진 역사마저 비현실적인 기억으로만 남아있다는 안타까움이다. 문어의 칼질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맘먹고 하려면 10년은 꾀부리지 않고 꾸준히 해야 어느 정도 도통한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오후에 ‘빈둥’에 희정씨가 맡긴 책,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레언 그레이의 초상’을 찾으러 읍에 나갔다. 평상시처럼 한결같은 은진씨의 밝고 고운 얼굴은 언제나 기분좋게 만든다. 커피를 한잔 마시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책을 갖고 나서며 읍내에 마음 놓고 물건을 맡기고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한결 풍부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달 오는 문예지 「우리詩」 이 달치에는 인물시(人物詩), 그것도 생존인물을 묘사하는 이인평 시인이 지리산 휴천재에 사는 남자를 시로 옮겨놓았다. 제목도 좀 거창하다: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풍모” 이인평 시인이 오래 전 손수 시문을 보내준 일이 있었는데 정작 문예지에 활자화되니 아내로서는 좀 어색하지만 시화(詩化)된 남편과 살고 있다는 감동을 준다.



철사옷걸이를 구부려 책받침을 만들어주는 보스코


6시에는 부전계곡 사는 인식씨가 도정에 올라가는 길에 잠시 들렸다. 그 골짜기 살며 원수 같이 미워하던 사람과 화해하고 지내다 보니 태극권도 가르쳐주고 딸과 자기의 주치의도 돼 주며 외국여행도 함께 하는 동반자도 되었다는 사연을 들려준다. 이웃에 대한 재발견, 만남의 신비에 대한 얘기는 참 길고도 아름답다. 


그러다 지금도 고발고소하고 재판 중인 이웃 얘기도 하는데 풍진 세상 싫어 찾아온 산골에 온 사람들이 개성이 강해서 늘 분쟁을 겪어야 한다면 참 힘들겠다. 싸움도 기운이 있어야 하고, 사악한 기운이라면 성수를 뿌려 구마의식(驅魔儀式)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


난 고요히 서 있으려는데 바람이 마구 불어와 흔들어대는 느낌일까? 우리 동네는 그나마 싸울 힘이 있는 사람도 없으니 잘된 일인가? 밤늦게 어둠 속에 보스코와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온 마을이 바다 속처럼 고요하다. 며칠 전 부면장님마저 당신이 나고 자라고 75년을 살아온 집 안방에서 강건너 양지로 옮겨 눕고 나니까 이 밤에도 불이 켜져 있는 30여 가구에서 남정이라곤 보스코를 포함 여섯이다. 당산나무 가지 새로 중천에 뜬 반달이 희끄름하다. 300년 넘게 마을과 집집의 삶과 죽음을 내려다 보는 나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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