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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아내 없는’ 자유평등평화
  • 전순란
  • 등록 2016-07-11 1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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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9일 토요일, 맑음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텃밭엘 내려갔다와도 달려갔다 달려오는 걸음인데 등짝과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른다. 동이 트기도 전 새들도 부지런히 아침식사를 하고서 피서차 나무 숲으로 숨고, 아침 열시 경에야 집주변을 기웃거리는 건 본 떼 없는 까마귀가 전부다. 새벽까지 열어놓아 집안의 열기를 빼내던 창문을 ‘외부 침입자’ 열기를 막으려 다시 꼭꼭 닫는다.


집안 청소를 하고는 이런 날 읽기 좋은 코엘료의 소설을 손에 든다. 머리 뜨거울 일도 없고 시간 보내기에 딱 좋다. 식당은 위층보다 2, 3도 낮아 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우면 멋진 피서가 된다. 그러다 점심 먹으러 집으로 내려올 진이네 모녀의 반찬이 맘에 걸려 11시경 몸을 일으키고 앞치마를 두른다. 진이네 모녀는 집에 와 점심을 먹고 나머지 일꾼들은 주유소 식당으로 간다.



이 부근에 식당이라고는 폐교된 문정초등학교 앞에 ‘문정식당’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데 8월 피서철에 그 집에서 민박하는 사람들이나 평상에 앉아 뭘 먹는다. 백연마을로 가다 한길가에 간판도 붙은 음식점이 있지만 가파른 커브 길에 자리 잡고 있어 정차도 주차도 힘들어서 열다 말다를 거듭한다. 융자를 얻어 건물을 지은 첫 주인은 얼마 후 부도를 내고 떠났다는 소문이 났고, 그 뒤에도 서너 번 주인이 바뀌었지만 늘 개점휴업 상태.


세종의 아들 ‘한남대군’이 귀양 와서 살다 사약을 받았다는 ‘새우섬’이 있어 ‘한남마을’로 불리는, 오리쯤 떨어진 동네에 작은 주유소(‘지리산 마지막 주유소’라고 적혀 있다)가 있고, 유일하게 그 안채에서는 ‘연중무휴’로 ‘함바집’을 한다. 여름에는 진이네처럼 블루베리를 따고, 겨울에는 동네방네 곶감을 깎고, 가을에는 양파를 심고 초여름엔 양파를 캐느라, 심지어 골골에서 집을 짓는 사람들까지 모두 그 집을 애용한다.




맛이나 반찬을 따질 처지는 못 된다. 휴천재 식당채를 지을 때 김대목에게 그 집을 소개했더니 이튿날부터는 자기들이 직접 해 먹겠다고 나섰다(남원에서 온 목수들이어서 경상도 음식이 어지간히 힘들었나보다). 그 바람에 한 달 간 목수들에게 국과 반찬을 해대느라 고생했다.


오후 다섯 시쯤 도정 진이네 블루베리 밭으로 산보를 갔다, 보스코와 함께. 진이 엄마와 제동댁은 선별작업을 하고 있고, 동네 아줌마들 다섯은 열매를 따고 있었다. 지난 호우에 고랑에 블루베리가 까맣게 떨어져 발에 밟히는 게 여간 가슴 아팠다. 주인 마음인들 오죽할까? 그래도 별 내색 안하는 진이 엄마는 참 당찬 여자다. 피로에 지쳐 링거를 맞으며 추수막바지까지 버텨 왔는데 끝까지 잘 버텨 주었으면...



엄마 일손을 도우러 내려와 여러 날 지내는 진이도 일이 힘들었던지 어깨가 아프다며 일찍 내려갔다. 엄마나 할머니가 농촌여성으로서 얼마나 힘든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지 도회지로 시집간 딸들이 기억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도정 골짜기를 오르는 내내 스.선생네집 쪽에서 구성진 노래가 스피커를 타고 끊이질 않기에 “아내는 여러 날 부산 가 있고 얼마나 외로우면 혼자서 노래방 기계를 켜놓고 노래를 부를까?”하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진이네 농장을 내려와 ‘솔바우’에 들렀다. 방문들은 모조리 열린 채였고, 주인을 닮아서 이웃이든 도둑이든 사람이면 다 반기는 개만 짖지도 않고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며 겅중거린다.


전화를 걸어보니 집주인은 가까이에서 마침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노랫소리는 윗편에 있는, 스.선생 처남댁에서 울려오던 소리였다. 아내가 없어도 그걸 자유나 해방으로 생각하는 남자라야 이 산속에 살 자격이 있는데 우리집 남자는 아내 없이는 단 한 나절, 단 한 끼를 감당 못하니, 우리집 남자와 사뭇 다른 경우다. 


놀라운 건 한길에서 30분은 걸어올라가야 하는 산골 도정마을에 '군내버스' 노선이 생겼다. 아침나절에 한번, 저녁 나절에 한번 하루 두 번 함양 가는 버스가 생겼다. 산골답게 25인승 버스가 빈 차로 올라왔다 빈 차로 내려가지만 노선이 생겼다니 나마저 신났다. 도정에서 내려오다 드디어 방학을 정식으로 맞아 내려왔다는 김교수도 보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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