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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단체로, 공평하게, 빠짐없이 걸린 그 해의 ‘디스토마 행사’
  • 전순란
  • 등록 2016-07-08 09: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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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7일 목요일, 맑다가 비


열린 커튼 사이로 해님이 살며시 들여다본다. 자기 없는 새에 무슨 일이 없었나 궁금했던지 창밖에 서성이며 대답을 기다린다. 나는 커튼을 활짝 열어주며 “자, 자, 자! 실컷 보슈!” 보스코 없는 날은 밀린 일 전부를 해치우는 날. 


우선 빨래거리를 모조리 걷어다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이부자리를 테라스에 널어 해를 받게 하고, 베개는 난간에 내다 말렸다. 끈끈하도록 습한 방이 삽시간에 보송해진 상쾌한 이 기분! 빨래도 기분 좋게 널어 말렸다. “오, 솔레 미오!”가 절로 나온다. 위아래층을 기면서 걸레질을 모조리 하고 나니 발바닥이 편하다. 보스코 말에 의하면 나는 마루바닥에 먼지 한 알갱이도 감지해내고 또 못 견디는, ‘초특급 센서 세포’를 발바닥에 장착하고 사는, 거의 ‘외계인’에 가깝단다.




두어 달 전부터 칡즙을 먹어와선지 청소를 하는데 그야 말로 땀이 비오듯. “그동안 여름에 땀이 좀 났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십여 년 전에 거친 갱년기보다 더 심하다. 칡즙이 준다는 여성호르몬 때문일까? 보스코도 걱정할 만큼 내가 땀을 흘린다. ‘명인당’ 섐에게 전화로 까닭을 물었더니만 칡즙은 모공을 활짝 열어주니까 가을에나 먹고 당장은 오미자를 먹으란다. 마침 엄엘리사벳이 맥문동, 인삼, 오미자를 차로 달인 ‘생맥산’을 선물로 보내왔기에 이건 어떠냐고 물어보니 바로 나 같은 증세에 먹는 거란다. 얼마나 고마운지! 열심히 챙겨 먹어야겠다. 뭔가 생각 없이, 몸에 좋을 거라는 생각으로 마냥 들다간 뜻밖의 증세도 생긴다.


재작년 겨울에 누군가 동네 앞 휴천강에서 물고기를 양동이 한가득 잡아왔다. 마을회관에서 10원짜리 고스톱이나 치고 10kg짜리 밀가루를 한 양푼 가득 퍼서 수제비를 빚어 요기하던 아줌마들에게는 파란 비늘이 뻔쩍이는 생선은 누가 봐도 맛난 횟감이었다. 땅 속에 묻어둔 싱싱한 무로 채를 치고, 눈 속에서도 노란 싹을 뾰족이 올리고 있는 파를 송송 썰고, 자식들한테 줘 보내고 남아 처마에 매달려 겨울바람에 흔들리던 마늘과 양파, 집집이 추렴해 둔 깨소금 고춧가루로 ‘깨깟이 손질해 종종 썰은 물괴기’를 양념해서 한겨울 특식이 차려졌다! 나에게까지 전화해서 회 먹으러 오라는 초대에 바쁘다 빠졌는데...



그 잔치 덕분에 우리 마을은 ‘함양군, 아니 경남에서 간디스토마가 가장 많은 마을’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을주민 전체가 보건소에서 주는 약을 받아 ‘물괴기회’처럼 사이좋게 나눠 먹어야 했다! 억울하게도 전화선으로만 회를 먹은 우리에게까지도 약이 배급되었다. 우린 안 먹었노라고 우겼지만 마을회관에서 한번이라도 밥을 먹었으면 물고기 썬 도마에 묻었을 디스토마균에 전염되었을 테니 기어이 약을 먹으라는 보건소장님 명령! 여하튼 단체로, 공평하게, 빠짐없이 걸리고 약먹은 ‘디스토마 행사’가 마을의 결속에도 도움이 되었다.


어제 저녁 독서회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은 친구들이 나눈 이야기. 제1편 ‘채식주의자’에서는 이해하는데 모두 힘들었다는 얘기, 남편과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고발(어려서 학습된 폭력으로 주인공이 자기보다 더 약한 새를 죽이는 행위)이 나왔다. 제2편 ‘몽고반점’에서는 욕망의 해제와 관능의 해방, 그로 인한 자해행위 등 인간의 성욕 저변에 깔린,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다운 행위를 읽었단다.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는 육식이 욕망과 폭력으로 돌아가는 세태, 아름답지만 자기 파괴적인 인간 속에 나무처럼 생명을 지탱하는 싱그럽고 푸르른 또 다른 세계가 공존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썼든 이해하는 독자가 더 똑똑한 경우가 많은데 우리 느티나무들이 그런 것 같다.


보스코는 서울집에 밤 11시에 도착해서 혼자 잠을 자고 아침 10시에 미아리 바오로딸 수녀님들을 찾아갔단다. 출판 홍보 사도직을 하는 수녀님들에게 닥친 위기, 대한민국 국민, 특히 가톨릭신자들의 ‘종이책 안 읽기’운동, 아니 스마트폰을 손에 쥔 호모 사피엔스들이 전 지구상에서 벌이는 ‘책 안 읽기 운동’을 맞아 사도직의 진로를 모색하는 자리였던가 보다.



하여튼 언제나 ‘가족’으로 우릴 맞아주는 수녀님들에게 두 시간 강연을 하고, 융숭한 점심을 대접받고(삼계탕!), 5시 30분 버스를 타고 왔는데, 읍내에 나간 나는 마트에 들러 (그의 ‘삼계탕 제 손으로 먹기’ 훈련을 시킬 생각이었을까?) 닭을 사들고 그를 맞으러 차부로 나갔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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