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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성직자 수도자가 된 자녀가 효자라는 교회 속설
  • 전순란
  • 등록 2016-07-04 10:23:12
  • 수정 2016-07-04 10: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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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3일 일요일, 장마비


얼마 만에 장마다운 장마를 만나 비다운 비를 보는지! 식당채 지붕은 양철지붕 못지않게 시끄럽다. 내 어렸을 적 가평 현리 교장사택은 적산가옥에다 지붕이 양철이어서 비가 쏟아지거나 천둥번개가 치는 날엔 사남매가 한 방에 꼭 붙어 앉아서 오들오들 떨곤 했다. 막내 호연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그런 날일수록 오빠가 들려주던 귀신 얘기가 무서우면서도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자정이 넘은 이 시각, 휴천재 겹창문도 휴천강 물소리가 거칠게 두드리고 간다. 오늘 같은 호우에는 운봉과 인월을 거치고 뱀사골과 백무동에서 흘러내린 휴천강은 붉은 황토물을 말갈기처럼 휘날리므로 적토마(赤土馬)가 내닫는 풍경이다.



주일이어서 공소예절에 갔다. 수녀님 있을 적엔 공소예절 후 영성체가 있었는데 그 특전이 없어지자 본당미사에 나가느라 숫자도 줄어 여남은 명이 조용하게 드리는 예절이다. 이달 중순부터 이종철 신부님이 오셔서 머무신다니 신부님과 누이와 제랑이 벌써 기다려진다.


휴천재 올라오는 길가에 심은 ‘키작은 해바라기’는 장대비에 하도 얻어맞아 멍든 얼굴들을 추례하게 숙이고 텃밭의 ‘키큰 해바라기’는 이 호우에도 대가 굵어 꺾이지 않고서 고개를 들고 서 있다. 빗줄기가 잠시 뜸한 사이 텃밭에 내려가 해바라기 꽃송이를 꺾어다 식탁에 꽂고 상추와 오이, 가지와 호박, 방울토마토도 따왔다. 함양 장에 나가도 내가 우리 텃밭에서 키우는 채소 이상의 것은 없어 내가 텃밭에 내려가 소쿠리에 담아오는 게 그날의 반찬이다.




미루 전화에 뒤이어 내 페친 성미씨가 전활했다. 우리 공소식구인 베드로씨의 딸 데레사 수녀를 보러 마천에 내려왔단다. 저녁에 휴천재를 방문하겠다기에 이 빗속에 사람이 오가는 일이 너무 미안해서 내가 마천으로 찾아갔다. 데레사 수녀는 작년에 프랑스로 갔는데 아버지마저 병상에 눕자 부모님을 돌봐 드리러 다시 한국으로 나온 길이었다.


부모님이 의지할 데 없어 딸이 돌봐드리게 말미를 주는 일은 참 보기 좋다. 어젠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는 신부님을 보았고, 오늘은 병든 부모님을 돌보러 온 수녀님을 보니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 자녀가 효자라는 교회 속설이 맞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나를 알아보시면서 “공소엘 데려다 주지 않으니 공소사람들을 통 볼 수가 없어요”라며 서운해 하신다. 처녀시절에 남편 ‘대구 서씨’를 만난 사연을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들려주시던 아주머니, 지아비에 대한 사랑과 자랑이 대단했던 분인데 86의 연세에 지금도 남편에 대한 애틋한 정이 줄줄 흐른다.



성미씨는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했지만 우리와 엇갈려 그곳에서 만난 적은 없었고, 그래도 같은 나라에서 유학했고 내 일기를 읽는 인연으로 친숙한 사이여서 마천 온 길에 내게 전화를 주었다. 내 페친이 이웃동네까지 다니러 왔다는 전활 받고 “그래요? 그럼 잘 다녀가세요”라고 끝내는 인사는 ‘모든 만남이 은총’이라는 아름다운 기회를 놓치는 실수이리라. 


감자를 까서 저녁을 준비하면서 케이크를 하나 구웠다. 비오고 우중충한 날은 달콤한 케이크냄새가 기운도 밝게 돋아준다. 친정 온 진이가 보스코의 새 컴퓨터에 이것저것 보충 프로그램을 깔아주고 정리해 주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우리 아들이 곁에 없으면 남의 딸이라도 우리 컴맹 부부를 도와주니 다행. 



진이를 처음 본 건 그니의 돌잔치였고, 초딩 시절 내가 부엌일로 바쁠 적마다 ‘꿩 대신 닭’(본인 말로는 ‘꿩 대신 봉황’)으로 보스코의 산보길을 동행하며 조잘거리던 소녀가 시집간 지 어언 3년차 새댁이 되었다. 그니가 아기를 안고 친정을 찾아오면 보스코는 아길 안아주고 싶어 아기 외할아버지 토마스와 차례를 다툴 게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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