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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공부만 빼고 다 좋아하는”
  • 전순란
  • 등록 2016-06-10 1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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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9일 목요일, 맑음


빵기가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다, 그곳 제네바 시간으로 밤 두시. 언제나 싼 표를 사느라 여러 곳을 경유하는 표를 구하다 보니 20시간이나 걸린다. 아이들은 잠들어있고 아내 지선이만 기다리고 있더란다. 가져간 보따리를 풀고 물건을 대충 정리하는 중이란다. 언제나 내가 하던 일 그대로다.


오늘은 보스코가 10시에 홍대부근에서 열리는 ‘정의와 기억 재단’ 출범식에 창립총회와 기자회견을 한다고 먼저 나갔고 짐 싸기와 뒷정리와 짐 싣는 일은 다 내 몫이다. 12시에 가톨릭청년센터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집에서 24km 되는 거리를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걸리다니! 자동차끼리 꼬리를 물고 서로 죽자 살자 매연을 내뿜으니 한강다리도 고층아파트도 먼 산 바위 봉우리까지 흰 너울을 쓰고 바라보는 듯하다. 지리산에 사는 ‘산사람들’과 달리 늘 저런 세상만 보며 사는 도시 사람들이니 서로에게 투명하고 애틋한 정이 자리할 여지가 참 드물겠다.



홍대앞 가톨릭청년센터는 90년대초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하며 참 많이도 드나들던 건물이다. 이 근처에 운동본부 사무실이 있었고 내 친구 영심씨가 이 건물 안에 ‘우리 밀 칼국수집’을 하면서 본부직원들 점심도 챙겼다. 공동대표였던 나는 찰기라곤 도무지 없던 우리 밀을 어떻게 요리하면 서양 밀맛에 익숙해진 사람들 특히 아이들의 입맛에 들게 할까 고민도 많이 했었다.


같이 공동대표를 했던 ‘한살림’의 박재일 선생, ‘밀 애비’를 자칭하며 우리밀 종자개량에 투혼을 쏟던 남중현 박사, 사무총장을 하며 얼마나 속을 썩였던지 위암에 걸리고 만 정성헌 선생, 여자로서는 가까이서 최선을 다 하던 신경은 이사, 그리고 밀 살리는 귀한 일을 거든다고 고생만 죽어라고 한, 지금은 ‘영원무역’에 상무로 있는 장경애 이사... 더러는 세상을 떠나고 더러는 어디 있는지 연락이 안 닿고 더러는 아직도 만나는 중이다. 그리운 얼굴들이다.


보스코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와 기억 재단’을 출발시키는 총회를 개최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창립추진위원회 공동상임대표를 맡아온 그는 ‘고문’으로 자리매김하고서 역할을 마쳤다. 그의 역할은 이제 어딜 가나 그저 ‘고문관 (顧問官)’으로 그쳐 다행이다. 나이로 보아 실무를 맡으면 그에게 고문(拷問)이 될 게 틀림없다. 언론에서만 뵙던 ‘정신대 할머니’들을 현장에서 만나뵈온 것으로도 감격적이었단다.



행사가 끝나고 식당에서 ‘성당패’(남녀장상연합회 회장단: 성가회총장 차수녀님과 인권위 담당 복자회 수녀님, 작은형제회 석수사님, 감정마을투사 한체칠리아씨)에게 점심대접을 하던 보스코를 태우고 광주로 출발하니 1시 30분. ‘수요시위’에서도 재단창립에서도 가톨릭인사들은 성과 열을 다하여 현장 운동가들에게서 깊은 존경을 받고 있더라는 보스코의 평.


7시에 광주 ‘가톨릭평생교육원’에 있는 ‘바오로딸 서원’에 도착했다. 수녀님들이 마련한 북콘서트에서 보스코가 이번에 나온 아우구스틴의 「고백록」에 대한 이야기를 두어 시간에 걸쳐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좁다란 서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진 갔다 산청으로 돌아 가던 길에 잠깐 들린 ‘귀요미’도 강연장에서 보고, 44년 전 빵기가 태어날 때 전남대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며 날 보살피던 선자씨도 남편과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길에 강연을 들으러 와서 잠시 신혼 초의 내 풋내기 신부로 돌아가기도 했다. 증정본을 받았다며 인사차 내려오신 김희중 대주교님도 뵈었다. 보스코의 이름을 보고 온 팬들도 많아 강연 후 역자 싸인회에선 책이 모자라 아쉬웠다.



밤 10시가 다 되어 신안동 살레시오 공동체에 도착하니 젊은 수사님들이 식당에 모여 있었다. 시험 끝난 기념으로 우리가 치킨을 주문해 드렸는데 우리 올 때까지 기다렸나보다. 시험이 끝난 수사님들은 내일 정원일과 대청소를 한다는데도 신나하며 공부만 아니면 뭐든 신날 것 같은 표정이다. 빵고처럼, “공부만 빼고 다 좋아하는” 이 분위기야말로 살레시안들의 고유한 ‘명랑 분위기’이자 어쩌면 불우한 청소년들과 늘 행복하게 함께 사는 저 젊은이들에게 돈보스코 성인이 내리시는 크나큰 선물인가 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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