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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 전순란
  • 등록 2016-05-16 10:11:05
  • 수정 2016-05-16 11: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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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4일 토요일 맑음


강 안개가 휴천재를 섬으로 만들었다. 멀리 떠가는 돛단배 같은 우리 집에 감나무 끝가지가 이별의 손을 흔들 뿐 사위가 고요하기만 하다. 날씨가 맑고 또 더울 징조다.


어제 저녁 늦도록 부부싸움을 했는지, 새끼들을 잃었는지, 아니면 집을 통째로 빼앗겼는지, 직박구리 부부가 부산하게 위아래로 날고 미친듯 비명을 지르지만 어디서도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그것들이 얼마 전까지 알을 낳고 품고 부지런히 먹이를 물고 드나들던 감동의 처마 밑은 휑~하니 비어 있다. 



요즘 조선반도의 모든 조선소를 한데 모아 호황을 누리던 거제도에 불어 닥친 불황과 해고가 저처럼 섬뜩하다. 사람은 타인의 아픔에 어디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매일 같은 말을 듣고 또 들으면 그 아픔에 젖어들만한데, 오히려 “그게 그렇거니” 아니면 “그건 그들의 일일뿐 나와는 상관없는 남 얘기려니” 하면서 내 사회적 양심이 무디어지는 게 예사다. 지난 이태동안의 세월호 사건을 두고 기득권층과 언론이 양아치식의 비정함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충분히 과시하였다.


‘살레시오 부모 모임’, 곧 살레시오수도회에 아들을 보낸 부모님을 모셔 먹이고 재우고 아들들이 재롱을 부리는 1박 2일 모임이 태안반도 끄트머리에서 있는 날이다. 우리가 함께 가고 싶어 초대한 미루가 10시쯤 휴천재로 왔다. 날씨도 맑고 ‘귀요미’가 와서 그니의 차를 운전하여 함께 가니 날개를 단듯 마음이 가볍다. 


보스코의 은사 노숭피 신부님과 


12시가 좀 넘어 광주 신안동 수도원에 도착하니 수도원 마당에 노신부님과 홍신부님, 이수사님과 나신부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우리를 반기시는 신부님들의 얼굴에서 살레시안 특유의 제스처, 학생들이든 어른들이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폭포처럼 쏟아 부어주는 환대를 받았다.


우리는 가까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함께 식사를 했다. 수백수 시를 암기하고 계시는 ‘걸어다니는 시집’ 박신부님이 저녁에 낭송해 주신 마종기시인의 시 ‘우화의 강’에서 처럼,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 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는 가슴이 메이지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가엾은 중딩 2년의 까까머리 보스코가 60여년전 처음 만났던 24세의 미국 청년 수사는 이제 80도 중반을 훌쩍 넘은 백발의 할아버지 신부님이 되어 뒷머리가 휑해진 70 중반 보스코의 어깨를 정답게 감싸 안아주신다. 


“신부님, 우리 보스코 옛날에 처음 보셨을 때 아주 작았죠?” 하는 내 물음에 노신부님은 깔깔 웃으시며 “지금도 쬐끄매요. 보스코 많이 안 컸죠”라고 하신다. 노신부님은 늘 제자의 행복을 염두에 두고 그 행복을 향해 가도록 두 팔 벌려 축복하신다. 내가 그분의 입에서 가장 자주 들어온 한 마디는, “나니야, 고마워! 우리 보스코를 행복하게 만들어줘 고마워” 그래서 살레시안과 함께 있으면 나는 늘 행복하다.




오후 1시 광주 신안동 수도원에 미루의 차를 놔두고 대절 버스를 탔다. 30여 명이 탄 버스는 전주를 지나며 여섯 명의 부모를 더 태우고 5시가 좀 못 되어 태안반도 끄트머리에 있는 ‘내리’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온 버스도 40여 명을 싣고 막 도착한 길이었다. 안젤라, 율리아나를 비롯한 동기 엄마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엘리사벳 언니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언제 보아도 반갑고 오랜만에 만나도 늘 곁에 있었듯이 친숙한 사이가 우리 엄마들이다.


저녁 기도를 올리고 6시에 저녁을 먹고는 1년만에 바닷가에 섰다. 작년보다 머리 하나씩은 더 큰 (율리아나의 손주) 보스코와 요한이 바위 틈에서 게를 잡았다 놓아주고 또 잡기를 반복한다. 인생은 해답도 없는 일에 노력과 단념을 반복한다. 오늘 지는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르는 이치다.



손님들의 식사후 식탁을 훔치는 광주원장 박해승신부님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아들 최원철 신부님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최신부님의 모친


저녁 7시 30분. 나무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걸으며 로사리오 기도를 올렸다. 끝나며 바다의 여왕께 찬가를 바치자(‘바다의 별이여’) 마지막 남은 빛이 바다 속으로 녹아 들어 안기며 밤의 안식에 머리를 뉘인다. ‘맘마말가리타회’ 회의가 한 시간 가량 있었고 9시 30분부터 친교의 시간!



살레시안들이 가장 살레시안 다워지는 시간이다. 올해는 수련자들이 두 명 밖에 안되어 대전에서 세바신부님이 오락시간 지원을 왔다. 웃으며 서로를 다시 바라보며 우리가 살레시오수도원에 내놓은 아들들을 통해 한 가족임을 확인하는 사이 11시가 넘어 파장을 알리는 각적소리와 함께 각자의 침실로 갔다. 길고 피곤한 하루였지만 아들들의 삶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어서 참참 행복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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